입력 : 2008.10.23 06:32
Waiting for Godot in Ireland
극단 산울림의 작품, 더블린 무대에
"코미디와 슬픔이 한데 뭉쳐져" 호평
"가자."(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한명구)와 에스트라공(박상종)은 그 순간 고개를 떨구고 바람 빠진 풍선마냥 축 늘어졌다. 암전. 아일랜드 관객은 좀처럼 일어서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배우들, 기다림에 대한 한국적 해석에 대해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임영웅이 연출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가 21일 밤(한국시각 22일 아침) 아일랜드 더블린의 베케트 극장에서 개막했다.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Beckett·1906~1989)가 수학한 트리니티 대학과 베케트 센터에서 초청한 한국의 《고도…》는 여백으로 승부하는 동양화 같았다. 40년 경력의 연극평론가 데릭 웨스트(West·64)씨는 "코미디와 슬픔이 한데 뭉쳐진 제의적이면서도 파워풀한 공연이었다. 아름답게 계산된(beautifully controlled) 무대 언어가 좋았다"고 평했다.
무대에는 물음표를 닮은 앙상한 소나무(2m 높이)와 둔덕, 둥근 보름달밖에 없다. 등장인물들이 갇혀 있는 '뻥 뚫린 감옥'이다. 50년 넘게 고도를 기다려온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잠깐씩 등장하는 포조(전국환)와 럭키(박윤석), 소년(김민석)의 무의미한 말과 움직임이 빈 공간에 들락날락한다. 구두 붙잡고 끙끙대는 에스트라공은 아이 같고, 블라디미르는 지적이지만 몸놀림이 부자연스럽다.
1막 초반 긴장했던 객석은 채찍을 든 포조와 양손에 무거운 가방을 든 럭키가 등장하면서부터 조금씩 웃음소리를 냈다. 럭키가 6~7분간 쏟아낸 독백은 소통에 저항하는 음악이었고 이 끝나지 않는 연극과 닮아 있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자 저글링, 포조·럭키 흉내내기, 희극적인 말투와 움직임은 그들이 처한 상황의 비극성과 충돌하며 또 다른 유머러스한 풍경을 빚어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떠나지 못하는 두 사내가 시간을 견디려고 하는 놀이'다. 고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고, 그들은 그저 늙어갈 뿐이다. 에스트라공은 간신히 잡아 뺀 구두 안을 보며 "아무것도 없네"라고 푸념하지만 이 연극은 속이 단단했다. 한명구와 박상종이 밀도 높은 앙상블을 보여줬고 전국환의 안정감에 신예 박윤석·김민석도 힘을 보탰다. 임영웅의 《고도…》는 한국·아일랜드 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행사의 하나로 베케트 극장에 초청됐다. 첫날 200석 객석은 가득 찼다. 영어 자막이 있었지만 무대 자체에 집중하는 관객도 많았다. 에반 플린(Flynn·29·영상 편집자)씨는 "한국 버전은 영어권 버전에 비해 신체극적인 색깔이 강했고 무대와 연출은 시적(詩的)이었다"고 말했다. 브라이언 싱글톤(Singleton) 세계연극학회 회장은 "베케트 작품이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26일까지 베케트 극장에 담긴 뒤 11월 18일부터는 서울 산울림소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02)334-5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