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적으로… 격렬하게… 객석에선 "이럴 수가" 탄성

  • 런던=김성현 기자

입력 : 2008.10.18 05:23

피아니스트 김선욱, 英 음악클럽 '밀힐'서 공연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12일 영국 런던 의 밀힐 음악 클럽에서 공연을 앞두고 한창 리허설하고 있다. 그는“연습은 차마 보여주기 쑥스러우니 야외 벤치 에서 기다려달라”며 웃었다. 런던=김성현 기자
지난 12일 영국 런던 북부의 밀힐(Mill Hill) 음악 클럽. 명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Ashkenazy)와 알프레드 브렌델(Brendel)이 리사이틀을 갖고,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Te Kanawa)를 영국에 소개했던, 반세기 역사의 유서 깊은 무대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녹음 직전에 연주 공간으로 쓰기도 했던 이곳에 스무 살의 한국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초청을 받았다. 객석은 단 230여 석뿐. 하지만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후원회장을 비롯해 세계 굴지 음반사 데카(Decca) 관계자까지 음악계 저명 인사들이 참석했다.

김선욱이 고른 곡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인 31·32번과 슈만의 〈환상곡 C장조〉였다. 그는 지뢰밭이라도 헤쳐나가듯 극도로 난해한 슈만 환상곡의 2악장 종결부를 흠결 없이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객석 오른편에서 "아(Ah)" 하는 감탄사가, 반대 왼쪽에서는 "이럴 수가(Jesus)"라는 말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폭발적인 다이내믹함으로 고전에서도 다채로운 표정을 찾아내는 것이 김선욱의 강점이다. 건반 위에 굵직한 땀방울을 연신 떨어뜨렸고, 한없이 서정적으로 노래하던 도중에 묵직한 건반으로 격렬한 긴장을 끌어냈다. 이 클럽 회장인 프랭크 코노프스키(Cornofsky)는 "스무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숙함과 지적 능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그는 8월 혼자서 영국 런던으로 떠나왔다. 영국 왕립 음악원에서 실내악 등을 협연하는 '펠로십(fellowship) 연주자'로 등록되어 있을 뿐, 학교에 뚜렷한 적을 걸어두지는 않았다. 대신 런던만이 아니라 베를린·루체른·로잔까지 라두 루푸(Lupu)와 안드라스 시프(Schiff) 같은 명피아니스트들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 학교 울타리를 떠나서 연주 현장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최근에는 "절정에서 결코 빨라지면 안 된다"는 루푸의 말을 '감정에 치우쳐 연주의 큰 흐름을 놓쳐선 안 된다'는 뜻으로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학교에서의 공부만이 아니라 동시대 연주자들의 음악을 보고 듣고 느끼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소중한 배움이 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지난 2006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 입상 이후, 김선욱은 세계적 음악 기획사인 아스코나스 홀트와 전속 계약 체결까지 쉼 없이 달려갔다. 그는 "낯선 곳에 처음으로 혼자 있으려니 한없이 작아지고 갈 길이 멀다는 걸 체감한다. 때로는 '선욱(Sunwook)'이라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조차 너무나 고맙다"고 말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가디언은 이날 레온 플라이셔,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넬손 프레이리 등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무대와 함께 김선욱의 공연을 '반드시 봐야 할 클래식 콘서트(must-see classical concerts)'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내년 2월 김선욱은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할 예정이다. 2010년에는 영국 명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지휘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와 4차례 협연한 뒤, 아시아 투어에도 동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