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한 & 밴쿠버 심포니 vs 사라 장 & LA 필하모닉

  • 성남문화재단
  • 글=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입력 : 2008.10.15 09:30

이번 달 국내 공연계의 큰 이슈 가운데 하나라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두 사람의 내한 소식을 꼽을 수 있겠다. 캐나다의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자로 내정된 힐러리 한(Hilary Hahn)과 미국의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협연자로 내정된 사라 장(Sarah Chang)이 그 두 주인공. 두 사람은 일주일 간격으로 각각 성남과 서울에서,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사진=성남아트센터

서로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힐러리 한과 사라 장, 두 사람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 일찍부터 조숙한 재능으로 주목받았고, 어린 나이에 메이저 음반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탄탄대로를 걸으며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분주한 일정을 소화해오고 있다. 둘은 나이도 비슷해서 힐러리 한이 1979년생, 사라 장이 1980년생이다. 국적도 미국으로 같다.

물론 다른 점도 많다. 힐러리 한은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 출신이고 사라 장은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원 출신이다. 나이는 힐러리 한이 한 살 위이지만 무대 및 음반 경력에서는 사라 장이 몇 발짝 앞서 있다. 메이저 오케스트라 데뷔는 사라 장이 여덟 살 때, 힐러리 한이 열한 살 때였고 음반 데뷔는 사라 장이 아홉 살 때, 힐러리 한이 열일곱 살 때였다. 소속 음반사도 다르다. 사라 장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EMI에 적을 두고 있지만, 힐러리 한은 소니(Sony)에서 데뷔한 후 현재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음반을 내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두 사람의 연주 스타일이다. 그것은 두 사람의 얼굴 화장에서 느껴지는 것만큼이나 첨예할 정도로 상반된 이미지로 다가온다. 사라 장의 연주가 직관적이고 대범하며 열정적인 이미지라면, 힐러리 한은 연주는 냉철하고 치밀하며 이지적인 이미지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선명하게 부각되는 유사점과 차이점들로 인해 두 사람은 종종 라이벌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강한데, 1997년에 힐러리 한의 데뷔음반이 나왔을 때 ‘우리의 장영주’와 비교하던 몇몇 기사들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사라 장의 소식을 접하면서 힐러리 한을 의식했고, 힐러리 한의


음반을 대하면서 사라 장의 행보를 체크해왔다. 그런 두 사람이 불과 일주일 간격으로 나란히 국내 무대에 오른다니, 그것도 콘서트 고어들의 바이올린 협주곡 선호도에서 순위를 다투는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를 연주한다니, 자못 흥분되는 일이라고 해야겠다.


얼음공주가 조각해 낼 차이코프스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한 기자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 물었다. "현재 세계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의 역사를 이어갈 만한 젊은 연주자로는 누가 최고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정경화는 주저 없이 '힐러리 한'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라 장이 들었다면 조금 서운해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정경화의 예견은 정확했던 것 같다. 그 후로 지금까지 힐러리 한의 행보는 또래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서 단연 독보적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불과 열일곱의 나이에 녹음한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곡들로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이래 소니에서 선보인 다섯 장의 음반은 하나같이 큰 호평을 받았고, 그녀는 20대 초반에 이미 가장 천재적이고 신뢰할 만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온도감이 다소 낮으면서 크리스털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음색과 예리하고 균형이 잘 잡힌 어프로치로 악곡을 치밀하고 견실하게 조형해내는 그녀의 연주에 대해서 혹자는 전설적인 바이올린의 명인들인 하이페츠와 밀스타인의 환영을 거론하기도 했다. 또 그런 연주 스타일은 그녀의 조금은 무표정한 듯 한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이미지와 결합되어 '얼음 공주'라는 별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소속 음반사를 DG로 옮긴 2003년 이후부터는 그녀도 조금씩 변모를 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기존 스타일은 고전적 조형미와 모던한 감수성 쪽으로 다소 기울어 있었는데, 요즘에는 거기에 풍부한 낭만적 호흡까지 가미하려는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최근에 나온 시벨리우스 협주곡 음반에서는 이전까지의 음반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농밀한 표정과 끈덕진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나이 서른 줄이 가까워 오면서 그녀도 내적?외적으로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리라.

서두에 언급했듯, 이번에 그녀는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자이다. 밴쿠버 심포니는 국제적인 지명도에서 몬트리올 심포니나 토론토 심포니에 못 미치지만, 90년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오며 클래식과 대중 공연의 양면에서 꾸준하고 견실한 활동을 지속해온 캐나다 굴지의 악단이다.

과거 이 악단을 이끌었던 지휘자로는 아키야마 가즈요시, 루돌프 바르샤이, 세르주 코미쇼나 등이 있고, 현재는 브램웰 토비의 통솔 아래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53년생인 브램웰 토비는 영국 출신으로 뉴욕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몬트리올 심포니 등 세계적인 악단들을 성공리에 지휘하여 실력을 인정받았고, 캐나다 위니펙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거쳐 2000년 9월부터 현재까지 밴쿠버 심포니의 음악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사진=조선일보DB
불꽃처럼 타오를 시벨리우스

사라 장에 대한 설명이 굳이 필요할까? 최근 몇 차례의 내한공연에 대한 일각의 반응이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고, 최신 음반인 비발디 '사계'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점이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다망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고 예의 선 굵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 스타일도 건재하다. 이번에도 그녀는 예의 불꽃같은 연주로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뜨겁게 연소시키리라.

사실 이쪽 공연에서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존재감이 한층 크게 부각된다. LA 필하모닉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더불어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메이저 악단이고, 이들을 인솔할 에사 페카 살로넨은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지휘자 중 한 명이다.

1958년생으로 핀란드 출신인 살로넨은 일찍이 주빈 메타가 전성기를 구가했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만년의 광휘를 드리웠던 LA 필하모닉을 1992년부터 이끌어왔는데, 탁월한 지휘 테크닉과 개성적인 음악 해석으로 우리나라 음반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린 바 있다. 그는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베네수엘라의 신성 구스타보 두다멜에게 17년간 정들었던 자리를 물려주게 되어 있기에, 이번 공연은 국내에서 살로넨과 LA 필하모닉 콤비의 무대를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애호가들이 연초부터 손꼽아 기다려왔던 이들의 공연은 10월 18일(세종문화회관)과 19일(예술의 전당) 양일간에 걸쳐 열린다. 스트라빈스키의 '불꽃놀이'를 애피타이저로 사라 장이 협연하는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1부를 장식하고, 첫째 날에는 라벨의 '어미 거위'와 '볼레로', 둘째 날에는 스트라빈스키의 '불새'가 2부의 메인디시로 준비된다고 한다. 하나같이 살로넨의 장기 레퍼토리들이라 더욱 구미가 당긴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