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의 연극, 오늘의 관객… 극단 미추 '은세계'

  • 성남문화재단
  • 글=김남석(연극 평론가)

입력 : 2008.10.15 09:16

사진=극단 미추

극단 미추가 준비하는 '은세계'의 대본을 읽는 순간, 새로운 '은세계'가 공연된다면 연극학자가 가장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인직의 작품 '은세계'를 근간으로 배삼식이 새로 구성한 이 대본이, '은세계'를 둘러싼 학계의 논란과 학문적 의문을 대거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배삼식이 '은세계' 공연을 둘러싼 일련의 정보를 충실하게 수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시대, 출현만으로도 반가운 작품

'은세계'를 둘러싼 기존의 논점은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당시 ‘신연극’이었던 '은세계'는 과연 어떤 점이 새로웠는가. 아니, 과연 새롭기는 했는가? 둘째, 이 작품에 참여한 판소리꾼의 면면과 역할은 어떠했고, 이를 진두지휘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강용환인가 이인직인가? 실제로 이 두 질문은 과연 이 작품이 신연극이라고 불릴 만큼 새로운 작품이었는가에 대한 의문과 맞물린다.

셋째, 원각사는 어떤 공연장이었는가. 원과 각진 도형 모양을 닮았기 때문에 ‘원각사’라는 설도 있고, 협률사와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배삼식의 '은세계'에서는 이러한 원각사의 명칭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넷째, 이인직을 둘러싼 의문이다. 이인직은 과연 정략적으로 친일을 한 것인가. 원각사 이후 이인직의 행적은 어떠한가, 아니면 우연히 친일을 한 것인가. 이인직의 작품, 특히 '은세계'를 순수 창작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일련의 의문처럼 다른 이의 창작을 일부 내지는 전폭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보아야 하는가. 이와 연관된 질문으로, 이인직에게 과연 연극 '은세계'를 구상하거나 연출할 실력이 있었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모든 이들이 수긍할 수 있는 학설은 아직 제시되지 못한 상태이다. 특히 소설가 이인직을 연구하는 측과, 연극인 이인직을 연구하는 측이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논란 역시 배삼식의 '은세계'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다섯째, 당시 공연장의 풍토이다. 근대극 초창기 조선의 극장 내부는 어떠했을까. 좌석의 형태와 배열은 어떠했고, 어떻게 표를 팔았으며, 어떻게 작품을 선전했을까. 막과 막 사이에 진행된 막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검열은 어느 정도였고, 관객들은 작품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러니 이 작품과 당시 연극 풍토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재구성 대본은 자신들의 고민거리와 일정한 해결 방안을 압축한 사례로 여겨질 수 있다. 물론 학자마다 자신이 신봉하는 학설이 반영될 때는 만족스러울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섭섭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이 연구한 세상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흥미진진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진=극단 미추

100년 세월의 길이에 속지 말고 본질을 꿰어야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배경 지식 없이 이 작품을 보아야 하는 관객들에게는, 재구성 대본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재구성 대본은 다양한 논점을 포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과거에 공연되었던 '은세계'의 의의에 초점을 맞춘다면, 배삼식의 재구성 대본은 탐관오리의 행태를 고발하고 민중의 자각을 염원하는 지식인의 바람을 강조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또 다른 논점으로 이인직의 삶과 행적을 주목한다면, 새로운 이념을 펼치기 위해 노력한 지식인과 친일 행각으로 전락한 잘못된 신념 사이의 길항 관계로 이 작품을 파악할 수 있다.

새로운 연극 풍조에 밀려나 전래의 기예를 왜곡시켜야 하는 전통 연희자(판소리꾼)의 운명과 관련지어 이 작품을 살펴본다면, 시대적 의의를 상실해가는 전통 예술의 서글픈 운명과 그 안에서 굴욕적 변신을 도모해야 하는 예술가의 일그러진 초상을 발견할 수도 있다. 원각사 극장을 재구하는 일에 비중을 둔다면 연극의 시대적 효용성과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만일 새롭게 살려낸 허구적 여인(이인직의 전처)을 부각시킨다면 조혼의 폐해와 여성의 자주적 삶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자. 이 모든 가능성과 논점을, 일반 관객이 일일이 따져서 파악하는 일이 가능할까. 관련 분야 전공자도 아닌데, 판소리 명창의 이름을 구분하고 원각사의 시대적 함의를 이해하고 신연극 '은세계'가 드러내는 연극사적 의의를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 필요하기는 한 걸까.

이 작품의 논점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결국 일반 관객이 혼란스러워질 위험성도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친 의욕을 정리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 위주로 연극 대본을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은세계'가 재공연되어야 하는 이유를 정직하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100년 전의 연극풍토를 살려내는 작업은, 지금―여기의 연극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숙고할 때만 진정한 가치를 담지할 것이다. 연극사적 정합성과 해박함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러한 자료 밑에 가라 앉아 있는 한국연극의 생명력과 본질을 탐구해야 한다. 100년 전의 연극은 지금 우리 연극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원각사가 무엇인지 몰라도, 이동백이 누구인지 몰라도, 이 작품을 둘러싼 에피소드를 일일이 구분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연극을 일반 대중들은 원할 것이다. 어렵겠지만, 미추의 공연은 이러한 일반 관객의 눈높이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연극사를 전공하는 ‘나’ 같은 이들에게 이 작품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위험해 보이는 것은, 바로 연극의 본질과 목표가 ‘관객’이어야 한다는, 당연하지만 소박한 명제가 잠시 간과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