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날엔 목소리 아끼려 전화도 꺼놔"

  • 런던=김성현 기자

입력 : 2008.10.13 03:26

英 로열 오페라 하우스 '라 보엠' 주연 테너 김우경
"자취방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사실적인 재미 살리려 애써"
1막 마지막 이중창 고음 열창 관객들, 퇴장뒤에도 계속 환호

11일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라 보엠》의 주인공 로돌포 역을 맡아 공연한 테너 김우경이 공연 후 분장실 에서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는“4막에서는 눈물 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런던=김성현 기자
테너 김우경(30)이 지난 11일 영국의 명문 오페라 극장인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라 보엠》(푸치니)의 주인공 로돌포 역을 맡아 성공적으로 공연했다. 지난해 1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베르디)의 알프레도 역을 부른 뒤, 1년 9개월 여 만에 대서양을 건너가 영국 최고의 무대에 입성한 것이다. 그동안 여성 소프라노(홍혜경·조수미·신영옥)와 저음 가수(베이스 강병운·연광철)의 활약은 눈부셨지만, 남성 주역을 소화하는 테너가 세계 유수의 오페라좌(座)에서 잇따라 주역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테너의 노래가 많은 데다, 인물의 성격을 잡기도 좀처럼 쉽지 않네요."

공연 후 무대 뒤편 분장실에서 만난 김우경은 1년여 전 뉴욕 메트 공연 때와는 달리, 한결 차분하고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이번 공연에서 그는 "극적인 설정 대신에, 바로 우리 곁의 자취방에서 일어나는 듯한 사실적 재미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마지막 4막에서 노래하다가 여주인공을 바라보니 미미도 울고 있었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글썽거렸다"고 말했다.
김우경은 1막의 아리아 〈그대의 찬손〉부터 청명한 고음의 목소리 결로 영국 청중의 박수를 끌어냈다. 미미의 열쇠를 찾아놓고도 짐짓 모른 척하거나 앙증맞은 발레 동작을 흉내 내며 그때그때 객석에 웃음을 불어넣었다. 1막의 마지막 이중창에서는 보통 테너들이 한 옥타브 가량 낮춰서 부르는 대목에서도 끝까지 고음을 유지해서 그가 퇴장한 뒤에도 관객들의 환호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김우경은 "원래는 고음을 안 하려 했는데, 첫 날 공연이다 보니 청중에게 제 노래를 선사해드리는 기분으로 불렀다"며 웃었다.

목소리가 악기인 성악가들에게 공연 당일의 목 상태야말로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소다. 김우경은 "공연 전날에는 영화 한 편을 더 보더라도 일부러 밤 2~3시까지 깨어있은 뒤, 다음날 오후 3~4시까지 무조건 늦잠을 잔다"고 말했다. 일어나면 가볍게 식사만 한 뒤, 곧바로 극장으로 가서 노래 연습을 하며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마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인데 일찍 깨어나서 무대에 오르기 전에 그 힘을 미리 낭비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목소리를 아끼기 위해서 아예 전화기 선을 다 빼놓고 말을 거의 안 하면서 인터넷을 하거나 악보를 보며 지낸다"고 했다.

공연 주간이면 노래하기 전날은 목소리를 아끼기 위해서, 노래한 날에는 목소리를 많이 썼기 때문에 포도주나 맥주도 안 마시며 1주일 내내 금주(禁酒) 상태로 지낸다.

김우경의 철저한 목소리 휴식 원칙은 독일 드레스덴 오페라 극장 전속 가수 시절 혹사에 가까웠던 경험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하다. "'월급쟁이 성악가' 시절에는 오전에 다른 공연을 미리 연습한 뒤에, 그날 저녁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 부르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전속 가수 생활을 끝내고 독립한 뒤부터는 가능하면 공연을 위해 목을 아끼지요."

김우경은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4차례 《라 보엠》에 출연한 뒤, 프랑스 툴루즈와 독일 드레스덴으로 건너간다. 다음 달 20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시인의 연가'라는 주제로 첫 내한 리사이틀도 갖는다.

테너 김우경은

한양대 음대와 독일 뮌헨 음대를 거쳐 2003년부터 독일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전속 가수로 활동한 뒤 독립했다. 2004년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 콩쿠르에 입상했으며, 지난해에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한국 남녀 성악가로는 처음으로 소프라노 홍혜경과 함께 동시 주연을 맡았다. 독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 등 세계 정상급 오페라 무대에 잇따라 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