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9.13 19:28 | 수정 : 2008.09.13 19:45
“요즘은 좀 미친 척해야 잘 사는 것 아닙니까.”
“젊은 연기자들의 대본이 하예요. 그러니 무슨 대화가 됩니까.”
“준비 안 하면 관객 한 사람하고만 눈이 마주쳐도 대사를 까먹지요.”
분야가 무엇이 됐든 대가를 만나면 배울 게 있다.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전송한 뒤, 가끔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뼈를 발라낸다고 했는데, 살코기를 너무 많이 도려냈다. 남긴 것 보다 버린 게 더 좋은 건 아닌가.”
지난 9월4일, 원로배우 김성원(72)씨를 만나고 나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는 9월9~10일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기 위해 뉴욕을 방문했다. 극단 현대극장의 판타지 창작물 ‘두 번째 태양(Another Sun)’ 출연 목적이었다. 1995년부터 8년 간 TV를 떠나 연극에만 전념해 온 김성원씨는 뮤지컬 ‘해상왕 장보고’에 출연하며 세계 26개 국가에서 공연을 가졌다.
뉴욕 특파원단과 자유롭게 나눈 그의 대화는 불과 3~4줄짜리 기사로 소화됐다. 왕창 발라내 단지 기자의 수첩과 머리에만 수북이 쌓여있는 김성원씨의 발언록을 한번 복원해 보았다. 기자 스스로에게 인상적인 것만 두서없이 모아보았다.

◆발음이 가장 정확한 배우
간담회에서 김씨와 오래 일한 제작자 최문경 한국청소년공연예술진흥회 이사장은 김성원씨를 “무대 구석까지 아무리 작은 소리도 전달할 수 있는 한국에서 가장 발음이 정확한 배우”라고 소개했다. 평양 태생인 김씨는 서라벌예대 1학년이던 1956년 기독교방송 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했다. 이와 관련한 김씨의 답변.
“마이크가 흡수해 버리는 소리가 있어요. 평소 얘기하듯이 대사하면, 관객들은 무슨 소린지 몰라요. 마이크가 소리를 먹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단지 ‘저 사람이 화났구나’ 이런 식으로 분위기로만 아는 거죠. 요즘 젊은 배우랑 연기하다 보면 대화가 안 되요. 물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하고 말 끝을 내려버려요. ‘그렇지 않습니까?’하고 물어야 되는 대목인데, 결론을 내는 말투를 하는 거예요. 사극을 보면, 누가 왕비고 누가 상궁인지 몰라요. 왕비는 상궁처럼 말하고, 상궁은 왕비처럼 말해요.”
◆“준비 안 해 가면 딱 한 사람 하고만 눈이 마주쳐도 대사를 까먹죠”
김성원씨는 배고픈 연극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관객의 기침 소리, 숨소리가 들려요. 내가 웃겼을 때 객석에서 ‘와’하고 나오는 웃음소리, 미쳐요. 반응이 즉각 오죠. 그래서 TV가 힘들어요. 맥락 없이 혼자 외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연극을 오래해 왔지만, 요즘도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가슴이 두근거려요. 물론 막상 오르고 나면 그런 게 없지만. 연극을 하려면 준비를 완벽하게 해야 돼요. 준비가 잘 안돼있으면 무대에 올라 관객 딱 한 사람 하고만 눈이 마주쳐도 대사를 까먹어요. 하지만 완벽하게 준비를 하면, 무대 전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근데 요즘 잘 나가는 TV드라마 등의 젊은 연기자들 보면 대본이 하예요. 저는 대본이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그렇거든요. 줄을 치면서 외우고 분석을 해야 하는데, 그냥 온 거예요. 대본이 하얗다고 뭐라고 하면 감독의 양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감독을 쳐다보면 고개를 끄덕끄덕 그래요. 내가 젊은 연기자들 야단을 많이 치니까, 뭐라고 말을 꺼내려고 하면 ‘저 대사 안 틀렸는데요’ 그럽니다. 대사만 안 틀리면 그만인 거예요. 근데 요즘은 좀 미친 척 해야 잘 사는 것 같아요. 사회가 그런 캐릭터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옛날에는 배우가 되려면 연극 무대에 먼저 섰는데, 요즘은 개그맨부터 출발하라는 얘기가 있어요. ”
◆“나는 절름발이 뮤지컬 배우”
그는 뮤지컬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최초의 창작뮤지컬인 ‘살짜기옵서예’를 연출한 임영웅씨가 하루는 연락이 왔어요. 잠깐 만 들렸다 가라고. 가서 봤더니 뮤지컬 배우들의 연기를 좀 지도해 달라는 거예요. 당시 패티 김 하고 서울대 음대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분들은 노래할 땐 신나게 했죠. 근데 대사를 하면 학예회 수준으로 하는 거예요. 결국 대사를 알려주면서 뮤지컬을 하게 됐죠. 사실 당시 나는 노래를 못하고, 가수들은 연기를 못하고, 그래서 절름발이였죠. 세월이 지나면서 노래, 연기, 춤을 모두 다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죠. 소위 악보를 읽고 연기할 줄 아는 세대. 남경주, 최정원 등이 전문 뮤지컬 배우로 불리죠.”
김성원씨는 그 동안 주로 연극무대에 있었지만, 가끔 TV에도 출연했다.
“ ‘파리의 연인’ 제작진이 엄한 노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해서, TV드라마를 했죠. 그리고 또 있는데, 박경림씨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뒤, ‘시트콤 안 해보실래요?’ 이러면서 하자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귀엽거나 미치거나’에 출연했죠. 사실 히트칠 줄 알고 했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원래 100회 분량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17회가 끝난 뒤 연출진으로부터 연기자들에게 개인적으로 편지가 왔어요. 그만하겠다고. 미안했던 거죠.(웃음)”
당뇨로 그 동안 건강이 좋지 못했던 김성원씨는 이번 뮤지컬에 기대를 걸고 빡빡한 해외공연 일정을 소화했다. 창작 뮤지컬로 브로드웨이 서는 만큼 좀 자랑하고 싶거나,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싶을 텐데 이 원로 배우는 좀처럼 선을 넘지 않았다. 조급해진 제작자가 “저렇게 겸손하시다”며 좀 더 작품을 홍보해줬으면 하는 기대를 은근히 표시하자, 김성원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거 왜 이제 목사님이 되신 임동진씨 있잖아요. 한번은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형님, ‘뮤지컬 레미제라블’ 있잖아요. 다양한 공연을 봤는데, 역시 제일 좋은 것은 우리배우가 하는 거데요.’ 대사가 들린다는 거죠. 이번 뮤지컬은 ‘브로드웨이급 뮤지컬’을 한국어로 듣는 기회가 될 거예요.”
참고로 뉴저지의 한인 식당에서 식사 자리를 겸한 이 간담회에서 그는 된장찌개를 시켜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