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노(老)스승 앞에 선 백발의 제자… 세월을 담은 쇼팽의 선율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9.13 03:03

피아니스트 한동일 독주회
어릴적 스승 김성복씨에게 슈베르트의 '즉흥곡' 바쳐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기분입니다. 어릴 적 떠나서 철없이 어려운 일도 겪었지만, 언제나 선생님이 계셨기에 고국을 잊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순이 넘어 백발이 성성한 제자도 여든넷의 노(老) 스승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11일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한동일(67)의 독주회였다.

그는 반세기 전인 1954년 미 공군기를 타고 도미(渡美)한 뒤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음악 신동 1호' '해외 진출 음악가 1세대' '첫 해외 콩쿠르 우승' 같은 수많은 호칭을 얻었다. 이날 한동일은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32번의 마지막 2악장이 끝나고 건반 위에서 손이 떠난 뒤 박수가 끊이지 않자 객석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어렵고 힘들던 시절에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손수 가르쳐주셨던 분이 김성복 선생님이십니다. 그분이 안 계셨다면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요."

그가 스승의 이름을 부르며 객석을 바라보자, 금호아트홀 뒤편 좌석에 앉아 있던 노 스승도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들의 따뜻한 박수에 답했다. 6·25 전쟁의 격변기였던 1950년, 당시 이화여대 교수였던 김성복씨는 자신의 돈암동 사택에서 수업료 없이 고사리 손의 한동일을 4년간 가르쳤다.

한동일은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이후에 더 이상의 앙코르는 필요하지 않겠지만, 오늘만큼은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스승에게 바치고 싶다"며 다시 건반에 앉았다. 정진우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이경숙 연세대 음대 학장과 김성복 선생의 아들인 이대욱 한양대 교수 등 원로·중견 피아니스트들이 박수를 보탰다.

3년여 만의 리사이틀에서 한동일은 젊은 시절 즐겨 연주했던 쇼팽의 작품과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로 프로그램을 꾸몄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본 셈이었다. 끝없는 덧칠로 화려함을 부각하는 청춘 피아니스트의 쇼팽과는 달리, 노년의 쇼팽은 한없이 덜어내고 빼내서 드세거나 모나지 않은 담백함이 가득했다.

간혹 나오는 미스터치처럼 세월의 풍화작용을 어쩔 수 없이 거스르기 힘든 대목도 있었지만,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과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에서 한동일은 건반에 놓인 양손 위에 나지막한 읊조림을 얹었다.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것은 단지 곡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기도 하다는 걸 이날의 읊조림이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