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취하고, 음악에 빠지고

  • 글, 사진=이지영(성남아트센터 홍보마케팅실 과장)

입력 : 2008.09.12 09:22

해외리포트,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

음악을 감상하려면 음반과 영상을 접하거나 공연장을 찾아가면 된다. 가끔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과 음악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면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이런 방법은 어떨까?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서양음악의 온상지인 유럽의 공연장을 찾아가 각종 페스티벌을 만나는 것.

문화를 제대로 접하려면 그 문화가 있는 곳을 직접 찾아가야 한다. 책이나 영상, 누군가의 말 등 어떤 것을 ‘통해’ 얻는 간접 경험보다 직접 발을 딛고 ‘겪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성남아트센터 후원회원 중 30여 명이 유럽에서 열리는 주요 음악 페스티벌을 찾아갔다.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무대의 오페라 '토스카' 와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의 독일 가곡 리사이틀, 이탈리아 베로나 아레나 극장에서 오페라 '리골레토' '나부코' '아이다'를 감상하는 일정이었다.

하루 평균 2시간씩 걷고, 3시간씩 도로를 달려 다음 도시로 이동하고 5개의 공연을 관람하는 9일간의 일정은 체력적으로 지칠 수 있었겠지만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평론가 장일범의 해설로 음악과 영상을 감상하고, 평론가에 버금가는 후원회원들이 서로 음악에 대한 애정을 나누다보니 좋은 시간이 되었다.

브레겐츠 오페라의 한 장면./사진=성남아트센터
오페라는 진화한다, 브레겐츠 페스티벌

처음 만난 공연은 브레겐츠 무대에 세운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였다. 독일, 스위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포랄베르크의 주도인 브레겐츠는 아름다운 보덴제 호수에 철근 구조물을 세워 무대와 관객석을 만들고 오페라와 콘서트, 연극 등을 선보이는 문화축제를 열어왔다.

놀라운 것은 잘츠부르크나 빈처럼 유명한 음악 도시가 아닌 이 작은 도시에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전 세계에서 모인 7천명의 관객이 공연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브레겐츠 오페라는 1995년,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로 처음 문을 열었고, 해골 모형의 인간이 책장을 펼친 무대로 화제가 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식탁을 무대로 한 푸치니의 '라 보엠',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그리고 푸치니의 '토스카'에 이어 내년에는 '아이다'를 준비하고 있다. 

노을이 지는 호수에 조명이 들어오면서 공연이 시작됐다. 2007/2008 시즌 브레겐츠가 '토스카'의 배경 무대로 구상한 것은 거대한 푸른 눈동자이다. 단순한 벽면으로 보일지 모르는 눈동자는 홍채 뒷부분이 움직이며 가수들이 등장하고, 물속에 묻혀있던 거대한 십자가가 무대 앞에 떠올라 세워지는 등 다양한 변화가 연출된다.

그런가 하면 공중에 돌출 무대가 등장해 카바라도시가 감금된 ‘감옥’을 만들기도 하는데, 마지막 장에 총살당한 카바라도시는 돌출 무대에서 몸을 굴려 보덴제 호수 위로 떨어져 죽는 장면을 보여준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장에 성벽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토스카가 호수 위로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토스카는 기중기에 실려 하늘 위로 올라간 후 공중에서 낙하하는 모습은 실감나는 영상으로 처리, 또 한번 연출의 묘미를 보여줬다. 

21세기의 문화는 ‘기술’에 의해 발전한다.

유럽의 작은 도시 브레겐츠가 전 세계 오페라 애호가를 끌어들이게 된 것은 뛰어난 아이디어와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력에 있었다. 브레겐츠 무대는 ‘플로팅 스테이지’(floating stage)로 소개된다.

말 그대로 ‘물 위에 띄운’ 것이 아니라 호수 깊이 철근 구조물을 넣어 단단한 지지대를 만들고 그 위에 무대를 세우는데, 공연이 시작되는 저녁이 되면 조명으로 마치 무대가 호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성악가의 목소리나 오케스트라의 소리, 그 소리가 공간에 퍼지는 잔향과 자연스러운 울림을 중요시한다. 애호가들 중에는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소리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적으로도 브레겐츠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찾아갔지만 가수들의 역량도 좋았고 무엇보다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압도하는 연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오페라 무대를 보면서 ‘기술’이 ‘문화’를 형성하고 완성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가라, 들어라, 보라, 느껴라

브레겐츠에서 공연을 본 후 모차르테움에서 열리는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와 피아니스트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의 리사이틀을 보기 위해 잘츠부르크로 이동했다. 브레겐츠에서는 우리 일행 외에는 동양인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잘츠부르크에는 관광객도 많았고 도시 전체가 ‘축제’ 중이었다.

이동할 때마다 재미있었던 것은 우리를 맞이하는 그 도시의 날씨였다. 브레겐츠 야외무대는 맑은 하늘과 선선한 날씨가 공연 감상에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줬는데, 잘츠부르크는 구름이 끼어 어둑어둑했고 가랑비가 내렸다. 슈베르트와 한스 아이슬러의 가곡을 감상하기에 약간의 비와 구름 낀 하늘은 더 운치있게 느껴졌다. 음악은 흔히 귀로 듣는다고 하지만, 가끔은 음악이 눈으로, 피부로, 가슴으로 전달되는 때가 있다.

공연을 보기 전 잘츠부르크에서 조금 떨어진 할슈타트라는 곳으로 관광을 떠났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괴르네와 안스네스, 독일 가곡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이날 괴르네가 노래할 음악을 들었는데, 가곡을 들으면서 바라본 차창 밖은 그림 같은 산과 호수가 비를 맞아 또렷하고 가깝게 다가왔다.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의 묘한 어울림은 매우 특별한 기억이 되어 주었다. 문화를 이해하려면 그곳에 직접 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슈베르트는 이런 자연을 바라보며 '봄의 신앙'(Fruelingsglaube)을 작곡했을 것이고, 비가 내리는 쓸쓸한 하늘 아래에서 '겨울 나그네'(Winterreise)의 심정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독일 가곡에 충분히 빠질 준비가 되어 있었던 탓일까? 이날 저녁 괴르네와 안스네스의 무대는 모차르테움의 훌륭한 울림과 어울려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흔들리거나 흐트러지는 호흡, 발음 하나 없는 완벽한 연주와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장조와 단조 간의 드라마 변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괴르네의 음악은 아름다웠다.

안스네스의 건반은 마치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것처럼 풍성하고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제아무리 세계적인 아티스트라고 해도 나에게 감동이 없다면 특별하지 않을 텐데, 큰 수확이었다.

독일 태생의 괴르네는 현 시점에서 독일 가곡 해석의 가장 탁월한 아티스트로 꼽힌다. 성남아트센터 개관 당시 초청되어 한국 초연 무대를 가진 적이 있는 그는, 내년 3월 다시 한번 성남 무대를 찾게 된다.

로마시대 세워진 원형 경기장 '아레나 극장'/사진=성남아트센터
시간을 거슬러 만끽한 19세기 오페라 무대 

서기 120~130년, 로마 시대에 세워진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 극장은 맹수 사냥과 검투사들의 결투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1913년, 베로나 출신의 테너 지오반니 제나텔로가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베르디 오페라를 공연한 이후 지금까지 오페라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2만 2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소리까지 무대 위에 다 전달될 만큼 전달력이 뛰어나다. 올해 아레나 극장의 프로그램은 '리골레토' '카르멘' '나부코' '아이다' '토스카'이다.

우리는 '나부코'와 '아이다'의 티켓만 예매해 놓았지만, 베로나에 도착한 날 ‘리골레토’ 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바리톤 레오 누치(Leo Nucci)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정 좌석이 아닌 돌계단에 올라가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브레겐츠가 현대 기술력에 의해 성공한 초현대식 무대였다면, 아레나는 어떤 것도 가미시키지 않고 19세기, 20세기 고전 스타일로 연출해 낸 무대이다. 브레겐츠는 성악가나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마이크와 스피커로 전달되었고, 오케스트라도 막힌 공간에서 따로 연주하는 것을 모니터로 봐야했다.

무대 세팅과 장면 전환 등 모든 것이 전자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아레나는 일체의 가공이 없었다. 무대 세팅은 기둥을 세우고 각 소품들을 조립시켜 망치로 고정시킨다.

브레겐츠는 장면 전환을 위한 휴식시간 없이 기계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이지만, 아레나에서는 막을 전환하기 위해 스텝들이 나와 조형물을 들고 움직이고 새로 들여온 무대에 못질을 하며 최소 15분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중간에 비라도 오게 되면, 오케스트라의 고가 악기가 물에 닿을까봐 연주를 중단하고 비를 피해 퇴장한다.

'리골레토'를 보러갔던 날에도 빗방울이 중간중간 떨어져 5번이나 공연이 중단되었다. 가격도 저렴한 돌계단은 일반 공연장과 비교하면 3층 객석 정도의 위치이다. '나부코'와 '아이다'를 봤던 지정 좌석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게 되는 시야도 좋았고 어떤 자세로든 편하게 볼 수 있고 신기하게도 이 높은 곳까지 소리가 다 들린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아레나 무대에 선 가수들의 기량은 대단히 훌륭했다. 레오 누치를 비롯해 질다 역을 맡은 데지레 랑카토레, '나부코'의 타이틀 역에 암브로지오 마에스트리, 최고의 아비게일레로 꼽히는 마리아 굴레기나 등 모두 만족스러운 무대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무대는 ‘리골레토’였다.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찾은 공연이라 모든 것이 감격스러웠을 수 있겠지만 음악도 좋았고, ‘아레나’만의 운치를 맛볼 수 있는 돌계단도 훌륭했다. 질다가 죽기 전 천둥 번개가 치는 장면에서는 극장 위로 실제 번개가 치는 것을 보며 흥미진진했고, 간간이 내린 비로 몇 차례 공연이 중단되면서 아레나 극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