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9.10 09:13
전통의 중심에서 창작을 외치다

황병기 명인이 1인 3역을 맡은 공연이 열린다. 9월 5일부터 10월 17일까지 금요일의 기획 공연으로 펼쳐지는 '황병기 명인의 창작 이야기'에서 연주자·작곡가·진행자로 관객 앞에 서는 것이다. 구축된 확고한 세계와 작품의 예술성, 그리고 여기에 관객을 매료시키는 진행 솜씨가 더해진 공연이니, 서울남산국악당은 공연물이 풍년인 가을에 확실한 '빅 카드'를 꺼내든 셈이다.
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황병기 명인의 창작 이야기'를 미리보기에 앞서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황병기는 가야금 명인이다. 그렇다면 명인의 첫 창작곡은 가야금곡일까? 정답은 ‘황병기 명인의 창작 이야기’ 속에 있다.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반드시 제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작곡가보다도 곡을 잘 해석하는 연주가가 분명 있다.”
지난해 황병기 명인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총 6회 공연으로 이뤄지는 '황병기 명
인의 창작 이야기’의 연주자 목록을 보면 명인의 이름은 드물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가 전곡 명인의 연주로 완성되리라 믿었다며 실망하기에는 고지연·이지영·박현숙 등 연주자들이 너무나 쟁쟁하다. 그들이 바로 명인이 말했던 '작곡가보다도 곡을 잘 해석하는 연주가'가 아닐까. '황병기 스페셜리스트'라 할 수 있는 연주자들이 총출동하기를 기대한다.
현대음악이라 분류하는 동시대 탄생된 음악이 오랜 세월동안 걸러지고 다듬어져 고전으로 자리한 음악에 비해 감상자의 공감을 사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상당수의 작곡가들이 작품 해석을 감상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지만, 한편으로 해석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 직접 마이크를 잡는 작곡가의 모습도 이따금 눈에 띈다.
작곡가의 해설이 더해진 공연의 장점은 음악에 '언어'라는 표현도구 하나가 더해져 작곡 의도를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명인의 해설이 갖는 의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명인의 음악을 사랑해온 관객이라면, 자신이 붙인 해석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갖는 이해와 수용의 다양성을 확인하는 시간으로 공연을 접하면 좋을 듯하다.

'황병기 명인의 창작 이야기'의 프로그램은 명인의 가야금 작품을 초기·중기·후기로 나누어 하루씩 조명한 뒤 성악곡들·대금과 거문고곡들·가야금산조가 차례로 이어지도록 짜여있다.
첫날 연주되는 '숲' '봄' '가을' '가라도' '석류집' '침향무'는 모두 1집에 수록된 곡들. 이중 ‘숲’ ‘가을’ ‘석류집’은 미국 동서문화재단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선정해 1965년 명인의 가야금산조와 함께 LP로 제작한 바 있으며, 현재 리매스터링 돼 ‘초기연주집’이란 이름으로 시중에 나와 있다.
이 모든 곡이 명인의 초기 작품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지만, ‘침향무’에는 조금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제는 또 다른 '전통'이 되어 후학들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주법의 혁신을 가져온 작품이라 평가 받고 있으며, 이후 중기 대표작인 '비단길'과 후기 대표작인 '하마단'으로 작품의 맥이 이어진다.
명인의 작품을 성격에 따라 묶어 떠올려 보면, 단악장의 대금 독주곡 '자시(子時)'(1978)는 언뜻 '미궁'을 연상케 한다. 1975년에 명인의 가야금과 현대무용가 홍신자의 인성(人聲)으로 공간사 주최 현대음악제 'Space 75'에서 초연된 ‘미궁’은 음악계의 뜨거운 반향을 끌어냈는데, 현을 활로 때린 진동이 만드는 음향, 장구채로 안족을 치는 효과,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하기 힘든 목소리 등이 당시 충격에 가까운 신선함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와 같은 놀라움으로 듣는 이를 빨아들이는 작품이 바로 '미궁'이다. 이번 시리즈에서 명인이 직접 가야금을 타는 곡이 오직 ‘미궁’이라는 점 또한 이 곡이 명인의 작품세계에서 갖는 중요한 위치를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목소리는 소프라노 윤인숙). 3년 뒤 완성된 '자시'는 그만큼의 센세이션을 일으키진 않았지만, 실험적인 주법과 독특한 진행이 새로운 세계를 그려낸 작품이라 주목할 만하다.
초현실세계를 나타내고자 했다는 명인은 목소리를 섞어서 대금을 불고, 두 가지 음을 동시에 내며, 입김이 아닌 입을 떨어 소리를 내는 등 다양한 변화 요구하며 혁신적이고 묘한 음색을 '자시'를 통해 빚어냈다.
이제 앞서 낸 퀴즈의 정답을 공개해야겠다. 명인의 첫 창작곡은 가야금곡이 아닌 성악곡이다. 노래에 대한 애정은 가야금을 시작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됐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음악반에서 독창자로 활동했고, 1940년대에는 방송에 출연해 노래했을 만큼 재능이 출중했던 것. 또 대학 시절에는 나원화 선생에게 가곡 한바탕을 배우기도 했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1962년 탄생한 '국화 옆에서'가 첫 창작곡이다.
9월 26일에 ‘국화 옆에서’와 함께 연주되는 ‘차향이제’(1998)는 박경선의 시 ‘차를 다리네’와 ‘차를 마시네’를 묶은 운치 있는 작품이고, '추천사' 향단이가 춘향의 그네를 밀어주는 텍스트에 내재된 보편적인 지향점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기대가 모아진다.
명인의 음악이 아방가르드적이긴 하지만, 언제나 도전적인 작품들만 내놓은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과 서정성이 마음을 끄는 작품들도 많은데, 필자는 기분 좋은 날에는 짤막한 다섯 악장으로 구성된 '춘설'을, 홀로 앉아 센치한 감성에 잠길 때에는 ‘밤의 소리’를 즐겨 듣는다. 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는 17현 가야금 독주곡인 ‘시계탑’이 있으며, 이 곡의 출발은 명인의 개인적 경험에서다.
“1999년 대장암으로 입원과 수술을 했다. 회복을 위해 병원 안을 산책해야 했는데, 서울대병원 남쪽 창으로 그곳의 상징인 시계탑이 보였다. 그때 구상하고 퇴원 후 만든 곡이다. 비참한 상황과는 반대로 무척 아름다운 곡이 쓰고 싶어졌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소녀취향적일 만큼 예쁜 곡이 완성됐다.”
화려하게 이어진 시리즈의 마침표는 정남희제 황병기류 가야금산조가 찍는다. 산조는 명인들이 내공을 응축해 완성하는 독주곡인데, 황병기류 산조는 구조적 미학이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지난 3~4월 ‘황병기명인의 가야금산조 이야기’에서 8가지 유파의 가야금산조를 선보일 때에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맡았던 박현숙이 이번에도 무대에 선다.
9월 5일 초기 가야금작품 / 고지연·김웅식
9월 12일 중기 가야금작품 / 안나래·김웅식
9월 19일 후기 가야금작품 / 기숙희·김웅식
9월 26일 성악작품 / 강권순·김경배·윤인숙·이지영
10월 3일 대금과 거문고작품 / 김정수·김준영
10월 17일 황병기류 가야금산조 / 박현숙·김웅식·김명숙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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