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9.08 09:08
극단 미추의 '리어왕'
10폭 병풍 두 개가 무대를 가리는 둥 마는 둥 한다. 《리어왕》(연출 이병훈)은 다 펼치지 않은 병풍을 조명으로 거칠게 훑으며 열린다. 어릿광대(이강미)의 피리 소리 뒤로 기둥 4개와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이렇게 텅 빈 무대에서 늙은 왕 리어(정태화)는 피처럼 붉은 옷을 걸치고 반닫이(궤짝)에 앉아 세 딸의 애정을 테스트한다. 영토를 떼어줄 참이다. 언니들의 애정 공세와 달리 막내 코딜리어(박설헌)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한다. 리어는 그 참뜻을 읽지 못 한다. 비극의 시작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주인공 리어는 한없이 추락한다. 진실에 눈이 먼 그는 결국 두 딸에게 배신 당하고 황야로 내몰린다. 그리고 미쳐간다. 《햄릿》에서 오필리어의 광기와는 다르다. 오필리어가 '미치고 만 순결'의 상징이라면 리어는 '어리석음으로 자초한 광기'다. 리어는 그러나 그 어두운 허허벌판에서 천둥과 번개, 비바람을 맞으며 직관을 얻는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주인공 리어는 한없이 추락한다. 진실에 눈이 먼 그는 결국 두 딸에게 배신 당하고 황야로 내몰린다. 그리고 미쳐간다. 《햄릿》에서 오필리어의 광기와는 다르다. 오필리어가 '미치고 만 순결'의 상징이라면 리어는 '어리석음으로 자초한 광기'다. 리어는 그러나 그 어두운 허허벌판에서 천둥과 번개, 비바람을 맞으며 직관을 얻는다.
개막일인 4일 공연 초반부, 정태화의 대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헛것일 뿐인 리어의 자만심이 우렁차게 전해지지 않자, 극 후반부와의 대비도 약해져 버렸다. 정태화의 모래 바람 같은 목소리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리어가 황야로 내몰린 뒤에 힘을 얻었다.
의상과 음악, 무대 디자인에서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뒤섞였다. 이병훈 연출이 추구한 미니멀리즘은 타악과 조명, 흔들리는 무대 막으로 빚어낸 폭풍우 장면에서 힘있게 객석을 흔들었다. "가난이란 것은 참 신기한 마술 같다. 보잘것없는 게 커 보인다"는 극중 대사와도 잘 어울렸다. 반닫이를 힘겹게 들어올리며 권력이 얼마나 무거운지 보여주는 대목은 유머러스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극단 미추 배우들은 믿음직스러웠다. 거너릴 서이숙, 리건 황연희, 글러스터 김현웅이 그랬고 에드거를 맡은 조원종은 발견의 기쁨을 줬다. 발성과 움직임, 연기가 부드러워 강한 잔상을 남겼다.
병풍이 닫히며 끝나는 이 연극의 명대사는 "우린 울면서 세상에 태어났지. 바보들만 득실거리는 이 거대한 무대에 떠밀려 나온 게 슬퍼서 울지"였다. 리어가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이 독백을 던질 때, 객석에 앉은 '바보들'은 화살이라도 맞은 듯 숨을 죽였다. 공연이 끝나고 세상으로 돌아갈 때 그들은 웃고 있었다. 130분짜리 비극이 준 보약이다.
▶10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월요일에도 공연한다. (02)747-5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