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ABC] '베를린 필 이후' 더 큰 울림 주는 아바도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9.04 03:08

최근 모차르트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음 반을 잇따라 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유니버설뮤직코리아 제공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 오페라 극장 라 스칼라가 건재하고 있는 도시가 바로 밀라노입니다. 이 곳 음악계에는 유명한 우스갯소리가 전한답니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베르디 음악원에서 미켈란젤로 아바도(Abbado)를 사사했지만, 좀처럼 인정을 받지 못해 고생했다고 합니다. 졸업 후 라 스칼라 극장에 지원하니 미켈란젤로의 아들이자 음악 감독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면접 심사에 나왔다고 합니다. 추천서를 받아오라는 말에 음악원에 돌아갔더니 이번엔 클라우디오의 형 마르첼로가 원장으로 앉아있더랍니다. 참다 못해 다른 악단에 원서를 냈지만, 거기엔 클라우디오의 조카 로베르토 아바도가 지휘자였답니다. 결국 이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바도 가문의 등쌀을 못 이기고 방황 끝에 삼류 음악가로 전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이탈리아 최고의 음악 명문으로 꼽히는 가문이 바로 아바도가(家)입니다. 실제 명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노 카르미뇰라(Carmignola)가 1971년 비토리오 베네토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심사위원장이 아버지 미켈란젤로였고, 3년 뒤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을 때 지휘자는 아들 클라우디오 아바도였습니다. 카르미뇰라는 "아바도의 전설 덕에 커왔다"고 털어놓으니, 이 가문이 베푼 덕도 결코 적지 않았나 봅니다.

아바도 가문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가 바로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입니다. 그는 불과 35세에 라 스칼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한 뒤 18년 간 극장을 이끌었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등을 차례로 맡았습니다. 카라얀 타계 직후인 1989년에는 드디어 '세계 최강 악단'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장으로 선출됩니다.

전형적인 음악계의 성골(聖骨)로 태어나 눈부신 경력을 쌓던 지휘자 아바도가 위기를 겪은 것은 거꾸로 정상에 등극한 뒤입니다. '음악과 군대에는 독재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카라얀 사후의 베를린 필에 민주화 바람을 불어넣고자 했지만, 격동의 한국 현대사처럼 그 과정에 악단 내부에서 혼란과 갈등이 오히려 증폭되기도 한 모양입니다.

현재 베를린 필의 바통을 넘겨받은 지휘자 사이먼 래틀(Rattle)은 "아바도는 언제나 '카라얀의 뒤를 잇는 지휘자는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 일을 맡게 될 줄은 몰랐다"고 전합니다. 아바도는 결국 베를린 필의 임기를 연장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2000년 위암 수술로 죽음의 위기를 넘긴 뒤 부쩍 야윈 모습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지휘자 아바도의 삶이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는 것은 베를린 필의 권좌에서 물러난 뒤입니다. 최근 내한한 유럽 연합 청소년 오케스트라(EUYO)와 말러 청소년 교향악단 등 청소년 음악 교육에 애정을 쏟았던 아바도는 2004년 젊은 단원들과 '오케스트라 모차르트'를 창단해서 왕성한 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올해 75세를 맞아 이 악단과 녹음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전곡(협연 카르미뇰라)과 모차르트 교향곡 음반이 잇따라 출시되고 있습니다. 2000년 베를린 필과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9곡) 실황과 1970~80년대 실황 영상(DVD)까지 '생일 축하 선물'은 풍성하기 그지 없습니다.

옛 악기나 연주법을 사용하는 '당대 연주'에 활짝 열려있는 아바도의 이번 모차르트 음반에도 투명함과 경쾌함이 가득합니다. 노년과 청춘의 음악적 만남에는 푸릇푸릇함이 그윽합니다. 때로는 정상에 올라가는 것보다 어떻게 내려가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75세의 노 지휘자는 삶으로, 음악으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