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수렁에서 건진 '마농 레스코'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9.04 03:08

국립오페라단 '푸치니 시리즈'

푸치니의《마농 레스코》에서 남자 주인공 레나토 데 그뤼 역의 테너 김영환(왼쪽)과 마농 레스코 역의 소프라노 이화영. /국립오페라단 제공
"나는 일본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

초초상(나비부인)은 철석같이 사랑을 믿고 있지만, 냉혹하게 말하면 미국 군인의 일본 현지처일 뿐이다. 결혼을 앞둔 미 해군 중위 핀커튼은 "언제든지 해약할 수 있는 조건"이라며 호기롭게 노래한다.

이 같은 인식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의 비극성이 싹튼다. 1막 후반부 '사랑의 이중창'에서 행복은 잠시 정점을 맞지만, 2막에 이르면서 곧장 추락하고 만다.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이소영)이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작곡가 푸치니(Puccini)의 오페라 4편을 콘서트 형식으로 잇따라 무대에 올리고 있다. 지난 3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 홀에서 처음 공연한 작품이 바로 《나비부인》이었다.

무대나 의상 없이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했지만, 오케스트라를 45도 가량 기울여놓고 그 주변에 흰색 바닥을 삼면(三面)으로 둘러놓았다. 등장 인물의 동선을 살려서 최대한 공간을 활용하려는 고심에서 나온 구도로, 지난 1999년 네덜란드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니벨룽의 반지》 무대와 같은 설정이다. 핀커튼 역의 테너 박현재는 1막의 아리아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양키〉부터 낭만적이면서 유쾌한 호색한의 모습을 호기롭고도 유려하게 묘사했다. 나비부인 역의 소프라노 김유섬은 1막 첫 등장에서 수 차례 음정이 불안했지만, 2막에서는 풍부한 성량과 탄력 있는 고음으로 '투란도트 같은 나비부인'처럼 결연한 여인상을 그렸다.

다음날인 1일 푸치니의 출세작인 《마농 레스코》가 이어졌다. 연이어 연주를 맡은 탓인지 프라임 필하모닉과 성악가 사이에 호흡이 고르지 못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2막의 미뉴에트 등 일부 장면이 삭제되면서 극 흐름이 다소 어색해졌고, 추방령을 선고 받은 마농을 구출하려다가 실패하는 3막의 굴곡 많은 드라마를 상상력만으로 이해하기엔 공백도 컸다.
전반적으로는 악전고투(惡戰苦鬪)에 가까웠지만 사랑과 허영을 모두 버리지 못하는 철부지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의 여주인공 마농 레스코 역을 맡은 소프라노 이화영이 위기에서 오페라를 구했다. 아리아 〈부드러운 레이스 속에서〉부터 사랑의 2중창까지 2막에서 소프라노의 절창이 이어졌다.

지난해 연말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 화재 사건으로 둥지를 잃으면서, 올해 콘서트 형식의 오페라가 쏟아지고 있다. 1948년 《라 트라비아타》 초연을 기준으로 올해 60주년을 맞은 한국 오페라의 초라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오페라가 '종합 예술'이라는 새삼스러운 원칙을 떠올리면, 사실상 무대·의상·연출이 빠져있는 노래와 연주만으로는 '반쪽짜리 잔칫상'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든다. 푸치니 시리즈는 8일 《투란도트》로 이어진다. (02)586-5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