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8.27 03:54 | 수정 : 2008.08.27 04:03
유금와당박물관 관장 유창종 변호사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오. 만세를 뻗쳐도 항상 오늘이로다.
- 고려 나옹화상의 서왕가 중
와당(瓦當)은 수키와의 끝을 마감하는 장식. 그저 기능적인 막음새에 불과하던 와당은 3,000년 전 중국에서 처음 등장해 전국시대를 기점으로 문양과 글자를 새겨 넣은 예술작품으로 본격화 되었다. 이후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에 꽃을 피운 와당 문화는 한반도로 번졌고 백제의 와공들은 바다 건너 일본으로 와당을 전파시켰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을 자랑했던 한국의 와당. 생활용품이나 장식품이라면 몰라도 그 옛날 조상들은 대체 왜 잘 보이지도 않는 처마 끝에다 예술작품을 매달고 살았단 말인가. 풍류와 불심(佛心)이란 답을 건넨 유창종 변호사는 수 천 년의 시간을 머금은 와당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구한다.
와당이 내게로 왔다
시간이 잠시 멈춰선 듯한 부암동 어귀, 북한산과 인왕산의 절경이 양옆으로 펼쳐진 석파정길에 천 년의 시간이 박제된 자그마한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유금와당박물관. 박물관이라면 휘황찬란한 왕관이나 빛깔 고운 도자기가 연상되건만 지붕을 장식하던 기와라니.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이 박물관을 만든 유창종 변호사는 30년 넘게 와당을 공부하고 수집해온 국내 유일의 기와 전문가. 시간만 나면 전국 방방곡곡의 유적지로 기왓장을 찾아 다녔고, 돈만 생기면 희귀한 기왓장을 구입하는 데에다가 썼던 그가 아니던가. 대검찰청 마약과의 초대 마약과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검사 시절에도 ‘기와검사’로 통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2002년, 반평생을 모아온 기와 1,875점을 아무런 대가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희사한 그가 더 많은 사람들과 와당의 미를 나누고자 시간의 창고를 개방한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1978년 충주지청 검사로 근무하던 중 우연히 접한 ‘육엽연화문’ 기와에 매료되어 기와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삼국문화가 섞여있는 충주 지역이다 보니 거기서 출토된 기와에는 세 나라의 특징이 다 나타나더라고요. 회백색에는 백제의 부드러움이, 웅건한 모양에는 고구려의 기백이, 연꽃무늬에는 신라의 소박함이... 기와 한 장에 한 시대의 미의식, 문화, 가치관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걸 본 순간 어떤 유물보다 값지게 느껴졌어요.”
1980년대 초반까지도 와당은 골동품상에서 물건 사면 덤으로 주는 개평 취급을 받았다. 값나가는 골동품이 아니다보니 공무원 월급으로 와당을 모으는 게 가능했던 것. 지금이야 ‘청자기와’와 같은 무수한 명품기와를 소유하고 있지만 유창종이 그 시절에 모은 와당에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부여의 골동품상에서 상품 가치가 없다며 공짜로 얻은 민무늬 와당은 잊지 못할 에피소드. 백제 민무늬 와당이 상당한 가치를 지녔음을 알게 된 것은 와당에 대해 해박해진 한참 후의 일이었다.
“검찰청을 떠나 변호사가 되자 수입이 늘었죠. 남들은 다른데 투자했을 텐데 저는 옳다구나 이제 기와나 실컷 모아보자며 돈이 없어서 포기했던 기와들을 다시 찾아 나섰어요. 그러던 중 일본에서 이우치 씨의 컬렉션을 양도받게 되었어요. 이미 자신의 컬렉션 절반을 한국에 기증했지만 아무래도 더 가치 있는 쪽은 일본에 남겨두었겠죠. 당시 컬렉션을 인수해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님이 이번에 박물관에 오셨는데 당신이 못 가져왔던 최상품의 와당들을 발견하고는 상당히 감격하시더라고요.”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는 ‘유창종실’과 나란히 ‘이우치실’이 있다. 1920년대부터 한국의 명품 와당을 모아온 일본의 의사 이우치 이사오는 1987년 수집품의 반을 한국에 반환했고, 나머지 반을 보유하고 있던 유족들은 이를 2004년 와당박사 유창종에게 양도했다. 최고의 와당 컬렉션이 다시 모인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만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를 개인이 환수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마이케나스’란 호칭에 더욱 무게중심이 실린다.
와당인생 30년
현재 세종 법무법인 베이징사무소의 본부장직을 맡고 있는 유창종 변호사는 1년의 반 이상을 중국에 머물고 있다. 중국에 있을 때는 근무시간을 제외하고는 베이징 외곽의 도시를 여행하며 새로운 와당을 찾아다니기 일쑤다.
부창부수라고 그의 아내인 금기숙 홍익대 미대 교수 역시 와당 예찬론자. 부부는 주말이면 함께 인사동을 누비고 와당을 찾아 오지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유금(柳琴)와당박물관이란 이름도 그와 아내의 성을 딴 것이다.
"와당을 모으면서 독특한 녀석을 발견하면 아내가 그림을 그리고는 했는데 그게 어느새 20여 작품이나 되더라고요. 나중에 와당과 와당 그림을 함께 전시해볼 생각이에요. 제가 와당을 수집하는 동안 아내는 흙으로 만든 인형인 토우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게 벌써 1,000점 가량 되네요. 패션디자인과 교수라서 그런지 옛 의복이며 신발 등이 고스란히 새겨진 인형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토우는 색이나 형태가 다양해 일반인들도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데 내년에 이 토우들을 선보일 계획이에요."
부부가 모아온 와당과 토우는 이제 수 천 점에 이른다. 때문에 한번 이사라도 할 요량이면 열 일 제쳐두고 와당부터 포장해서 살림살이보다 먼저 새 집에 옮겨두는 게 유창종의 임무였다. 그나마 여타 골동품에 비해 부피가 작고, 파손 위험도 덜한 와당이기에 가능했던 일. 박물관을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보관과 이동에 관한 문제해결이었다.
30년을 하루같이 와당을 연구하다 보니 한·중·일 3,000년의 역사를 꿰뚫게 된 유창종. 동아시아 각국 기와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 보면 문화의 교류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에 그가 창설한 기와학회에서는 5주년을 기념하며 올해 한·중·일 와당을 주제로 세미나도 준비하고 있다. 2005년 한국박물관회 회장직을 역임한 것도 괜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와당부터 베트남, 태국 와당까지 일일이 만져보고 소장한 사람은 국내에서는 제가 유일할 거예요. 때문에 진품 감정 의뢰도 받고 와당을 구입할 때도 골동품상 주인들이 알아서 가격을 매기라고 할 때가 많죠. 하하. 가끔 속아서 가짜 와당을 비싸게 사오는 분들도 있거든요. 아무리 베테랑 골동품상도 전문분야가 아닌들 진위를 판가름하는 게 쉽지 않죠."
모든 골동품이 그렇듯 가격을 매기는 기준은 첫째는 예술성, 둘째는 형태의 완전성, 셋째는 역사적인 가치, 넷째는 희소성에 따른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일반인도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지만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에야 판단하기 어렵다.
그 역시 가짜 와당을 구입한 적이 있지만 ‘보는 눈’이 생기고 가짜에도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된 후 일부러 가짜를 사기도 한다. 언젠가 ‘가짜 와당 전시회’도 열어볼 심산으로.
"한 가지 문양의 와당을 제작하면 훨씬 편하고 경제적이었을 텐데 조상들은 왜 보이지도 않는 지붕 위에 그토록 정성을 쏟았을까요? 불교적 신앙심과 삶에 대한 신념 등이 그 작은 기와에도 반영된 것일 테죠. 최고의 주거공간이라는 강남의 한 아파트와 처마 끝에 와당을 매달고 살던 조상들의 주거문화를 비교해보면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나요? 와당을 보면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돼요."
와당이 가르쳐 준 삶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유창종 변호사는 그 답도 결국 와당에서 찾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와당에서 민족의 가능성을 보았고, 사고의 폭을 넓혔으며, 삶의 지혜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그 깨달음을 세상과 나누고자 한다.
"와당을 공부하면서 한국인들이 청출어람의 재주를 가졌음을 눈으로 확인했어요.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화에 창의력을 발휘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죠. 와당도 중국에서 건너왔지만 아름답고 정교한 문양의 통일신라시대 와당에는 견줄 바가 못 되거든요. 중국 땅 밖에서 청자를 만든 나라도 한국뿐이고, 금속활자며 회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은 청출어람의 기질이 다분해요."
삼성 애니콜을 현대판 고려 상감청자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우리 안에 흐르는 예술성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없는 획일적인 교육 환경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유창종은 와당을 통해 얻은 ‘사고의 확장’이라는 두 번째 깨달음을 유독 강조한다.
"“와당을 공부하다보면 사고의 시공이 커지게 돼요. 평소의 생각이 3,000년을, 아시아를 넘나들다 보니 문화와 예술, 역사와 철학을 맛보고 즐기는 훈련이 가능하더라고요. 그래서 중요한 일을 앞두면 10년, 20년 후에 미칠 영향까지를 생각해보게 돼요.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그 누구도 한국의 100년 뒤, 200년 뒤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모두들 바로 내일의 문제에 급급해하죠."
자신이 와당을 통해 사고의 폭이 넓어졌듯 우리나라 지도층과 청년들도 와당을 공부하면 좋겠다며 그는 중국의 한 골동품 상인 이야기를 꺼냈다. 중국의 한 시골 골동품상에서 마음에 드는 와당을 발견했는데 주인에게 가격을 묻자 그는 팔 생각이 없더란다.
값을 잘 쳐주겠다며 설득했지만 주인은 그걸 팔면 당장의 생활은 나아지겠지만 자신의 아들 대에는 얼마가 되고, 손자 대에는 얼마가 될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중국 상인도 가진 혜안을 우리가 못 가질리 만무하다고 말하던 그에게서 천년 와당을 닮은 따스한 깊이와 강건한 지혜가 묻어나왔다.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고 영화라고들 하잖아요.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섰을 때 내가 살아온 인생을 영화로 보여줘야 한다면 ‘재미없어 못 보겠다’ 던져버릴 정도는 안 되어야죠.(웃음) 산에도 오르고, 바다에서 헤엄도 치고, 실수도 하면서 만들어 가는 게 즐거운 인생이 아닐까요. 전 검사를 하면서도 남이 안하는 것을 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지금도 하고 있어요. 삶은 한 번 뿐이라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필름인데 기왕이면 즐겁고 풍부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야죠. 그러려면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각본 정도는 한 편 써두어야 하지 않겠어요."
인터뷰 다음날 하남의 한 초등학교에서 3·4학년 학생들 단체관람을 온다고 했다. 작은 박물관에 백여 명의 아이들이 들어오려면 한창 가꾸고 있는 잔디밭이며, 아담한 휴게실을 모두 내어줘야 한다.
하지만 ‘관장님 특강’을 부탁하며 담당 교사가 보내온 편지 한 통에 유창종 변호사는 전원 무료관람으로 회신했다. 풍부한 삶을 위해 그가 고른 각본은 베풀며 사는 인생. 와당을 모으고 와당을 배우며 더불어 얻은 것은 결국 사람이고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