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해도 아시죠?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8.08.21 02:41 | 수정 : 2008.08.21 05:24

대사없는 '비언어극' 인기
퀴담, 말없이 '시장 싹쓸이' 난타·점프·젠·보이첵…
새로운 韓流 콘텐츠 기대 "움직임이 더 깊은 울림 줘"

무대에서 말(言)이 지워진다. 움직임이나 춤, 연주가 배우들의 말을 대체하고 있다. 대사 없는 '비언어극(nonverbal performance)'의 범람이다. 20일 국내 최대 공연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ticket.interpark.com)에 따르면 비언어극은 지난 3년 동안 편수와 매표액이 가파르게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래픽 참조

지난해 국내 초연된 《퀴담》은 곡예와 음악 중심의 예술 서커스(제작비 120억원)로 30억원 이상의 수익을 남겼다. 올 10~12월엔 태양의 서커스 두 번째 작품 《알레그리아》가 들어온다. 파란 물감을 칠한 세 남자가 타악으로 무대를 채운 《블루맨 그룹》 내한 공연은 '비언어극의 클래식'이라는 평을 받았다. 서커스 《레인》, 마술쇼 《팬양의 버블쇼》 등 여러 형태의 비언어극들이 한국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토종 비언어극의 성공 스토리도 많다. 해외에도 진출한 요리 코미디 《난타》와 무술 코미디 《점프》는 올해 각각 제주와 부산에 전용관을 새로 오픈했다.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를 필두로 2006년 본격 등장한 비보이 공연들은 《브레이크아웃》 《마리오네트》 같은 히트작을 낳으며 붐을 이어가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의《알레그리아》. 곡예 와 음악으로 속을 채운 비언어극이다./마스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정부도 비언어극을 육성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2006년 '코리아 인 모션(Korea in Motion)'이라는 비언어극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세계의 다른 공연 축제와 차별화하면서 한류(韓流) 관광 콘텐츠를 만들자는 전략이었다. 2006년 6편, 2007년 12편이었던 축제 참가작이 3회째인 올해(11월 1~9일 대구)는 20편을 넘길 전망이다.

비언어극의 활황이 주목되는 이유는 또 있다. '해설이 있는 발레' '해설이 있는 클래식' 등 발레·클래식에서는 이야기를 삽입해 더 많은 대중을 만나고 있는 것과 반대로 비언어극들은 ▲해외 진출을 겨냥한 보편적인 무대 언어 ▲'연극은 어렵다'는 고정관념 파괴 ▲이성 중심의 언어에 대한 불신 등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타》 《점프》의 성공이 무대 언어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 것은 분명하다. 《점프》 제작진인 연출가 최철기, 코미디 감독 백원길 등은 중국에서 한·중 합작 비언어극 《젠(Zen)》을 만드는 등 해외에서도 러브콜을 받고 있다. 배우 11명이 의자 11개만을 이용해 주인공의 내면 풍경과 다양한 공간을 보여준 《보이첵》은 국내보다는 뷔히너의 원작을 잘 아는 유럽 관객에게 잘 통했다.

비언어극의 증가가 한국만의 추세는 아니다. 김윤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이성 중심의 사회가 붕괴되면서 즉각적이고 육체적인 비언어극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며 "지난 세기 《고도를 기다리며》가 다변(多辯)과 무의미한 언어로 언어 자체를 부정한 것과 동전의 양면 같은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보이첵》을 연출한 임도완은 "찰리 채플린, 알 파치노 같은 명배우들은 표정이나 언어로 설득하지 않는다. 움직임과 메타포로 이야기를 전달할 때 더 깊은 지점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