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8.19 04:31
세계의 거장을 찾아서
<1> 현대미술 대가 안젤름 키퍼 한국언론 첫 인터뷰
1969년, 서구 미술계는 경악했다
당시 금기였던 나치를 다룬 연작‘지배’를 발표한 것
삶과 죽음, 존재의 기원 등 묵직한 주제 다뤄
"예술은 대답이 아닌, 대답에 대한 환상을 주는 것"

조선일보가 전세계 문화예술계를 움직이는 거장들을 찾아간다. 사무실에 마주앉아 단편적인 문답을 나누고 작별하는 인터뷰가 아니다. 좀처럼 타인을 들이지 않는 거장들의 영지에 날아가서 심장 깊숙이 스며드는 질문을 던지고 깊은 대답을 이끌어내는 인터뷰다.
그 첫 순서로 생존 현대미술 작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안젤름 키퍼(Kiefer·63)를 프랑스 바르작(Barjac)에서 국내 언론 최초로 단독 인터뷰했다. 독일 출신인 키퍼는 1992년 바르작에 정착한 이래 26년에 걸쳐 거대한 영지(35만㎡·10만5800평)를 조성하고 건축물 수십 채와 설치미술 작품을 세웠다. 들판 전체가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본지 인터뷰는 그가 바르작에서 언론과 나눈 마지막 대화다. 키퍼는 이제 그곳에 없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키퍼가 떠난 바르작 작업실을 맡았다. 수년 내에 이곳은 키퍼의 작품을 영구 보존하고 연구하는 '키퍼 미술관'이 될 전망이다.
'그'의 영지(領地)는 고대(古代)의 지하유적 같았다. 아일랜드 화상(畵商)을 따라 어두운 터널을 지나자 빛이 쏟아졌다. 네모난 천장으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계단을 오르자 새파란 하늘 아래 남불(南佛) 특유의 완만한 구릉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바로 그곳에 재(災)와 숯과 진흙을 짓이겨서 그린 대형 회화가 걸려 있었다.
'그'는 독일 출신의 세계적 화가인 안젤름 키퍼(Kiefer·63)였다. 프랑스 바르작에서 키퍼와 만났다. '작업실'보다는 '영지(領地)'라는 말이 어울렸다.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대형 회화와 설치미술 작품이 들판 곳곳에 서 있었다. 긴 터널이 땅 밑으로 구조물을 연결했다. 몇 ㎞나 되는지 작가 본인도 정확히 모르는 미로(迷路)다. 터널에서 구조물로, 다시 구조물에서 터널로 어둠을 더듬어 가는 탐색 자체가 작품이다.
"올 때마다 달라요. 새로운 구조물, 새로운 그림, 새로운 터널이 뚫려 있어요. 세간(世間)에선 그가 은둔자(隱遁者)라고 해요. 그렇다고 그가 한가하게 지낸다고 하면 오해예요. 그는 치열하게 살아요. 종일 조수들을 지휘하고 그들이 돌아간 뒤 늦도록 혼자 작업을 계속하지요."
키퍼와 마주앉은 곳은 영지 속 그의 거처였다. 그는 오래된 비단공장을 개조해 작업실을 여러 동(棟) 짓고 그 중 한 곳에 침소·욕실·거실·식당이 하나로 뻥 뚫린 생활공간을 만들었다. 선승(禪僧)의 다실(茶室)처럼 희고 밝고 적막했다.
―당신은 평생 삶과 죽음, 독일 과거사, 존재의 기원과 한계 같은 묵직한 주제를 다뤘지요. 당신에게 미술은 무엇이었나요?
"미술은 내게 살아 갈 가능성을 줬어요. 미술 없이는 못 살았을 거예요. 인간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요. 그러나 대답은 얻지 못하죠. 법학자와 과학자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더 많은 질문이 솟아나지요. 나는 그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술을 했어요."

―예술이 대답을 주나요?
"예술은 대답이 아니라 대답에 대한 환상을 주지요. 인간은 그 환상 없이 살 수 없고요."
그는 "내 존재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이 평생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였다"고 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설명을 찾아 헤매되 그 해답은 영영 찾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자 운명"이라고 했다.
그는 "심지어 앤디 워홀도 정신적이었다"고 했다. "워홀은 (팝아트를 통해) '우리가 믿는 것들이 실은 세상에 덧씌워진 얄팍한 피부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는 공허함의 대가였고 공허는 정신적인 주제지요."
키퍼는 1945년 독일 도나우에싱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동네에서 뛰어 놀았다. 부모는 천주교 신자였다. 어린 키퍼는 교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첫 영성체 때 그는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자기 눈 앞에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하리라 기대했다. 그 기대가 깨졌을 때 그는 종교에 대해, 인간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다면 맨 끝에 도달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우주 속으로 녹아 없어지겠죠. 사실 우리는 지금도 텅 빈 존재예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原子)는 중성자와 전자가 허공에 떠 있는 형태로 되어 있거든요. 이렇게 녹아 없어지는 것이 바로 정신성이에요. 우리는 사라지고, 더는 아무 것도 묻지 않게 되겠죠."
이 선문답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는 끝났다. 까다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키퍼가 "저녁 먹고 가라"며 붙들었다. 별이 총총 떴다. 캄캄한 들판에서 개구리가 울었다. 식탁의 화제 중에 임박한 이사문제가 있었다. "이제는 채울 만큼 채웠고 떠날 때가 됐다"는 이유이다. 그는 바르작 영지를 뒤로 하고 파리를 거쳐 다시 유럽 모처(某處)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26년간 전심전력을 기울여 바르작 영지를 창조했다. 프로방스식(式) 볶음밥을 씹으며 "훗날 이곳에 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으냐"고 물었다. 키퍼는 빙긋 웃으며 와인잔을 기울였다. "아마 안 올 거예요." 그를 오래 지켜 본 아일랜드인 화상이 "키퍼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 그는 누구? 신화·철학·중세 연금술 섭렵… 국내서도 세차례 전시회
안젤름 키퍼를 "살아 있는 가장 중요한 미술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는데 이견을 낼 평론가는 거의 없다. 그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법대를 거쳐 뒤셀도르프 미대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전위예술가 요제프 보이스(Beuys·1921~1986)에게 사사했다.
키퍼는 1969년 자신이 유럽 곳곳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장면을 찍은 자화상 《지배(Occupations)》연작으로 서구 미술계에 충격을 던졌다. 그는 금기(禁忌)를 부수고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다룬 첫 독일 현대미술 작가였다. 이후 키퍼는 인간과 우주, 신화와 선사(先史), 자연과 문명, 철학과 신비주의, 중세 연금술과 고대 유대교로 관심의 지평을 넓혔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친숙한 작가다. 1995년, 2001년, 2008년 세 차례에 걸쳐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