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8.14 04:34
서울대 학장지낸 피아니스트가 친구 위해
악보 넘겨주는 대관령 음악제
그래미상 밴드 고사리손 밴드
실내에서 바닷가에서 제주 관악제

우아한 실내악과 시원한 관악. 여름의 끝을 적시는 음악 선물이다.
국토의 남단인 제주도에서는 올해 13회째를 맞은 제주국제관악제가, 동쪽 끝인 강원도에서는 제5회 대관령국제음악제가 '여름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음악 팬들의 발걸음을 앞다퉈 붙잡는다.
◆악보를 넘겨주는 음대 학장님
"내가 혹시 뭔 일을 저지르더라도 웃지 말아줘."
지난 9일 대관령국제음악제가 열린 강원도 용평리조트의 눈마을홀. 피아니스트 신수정 전 서울대 학장이 무대에 올라왔다. 당초 공연자 리스트에는 신 학장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다.
지난 1998년 타계한 한국계 미국 작곡가 얼 킴(Earl Kim)의 〈린다에게〉를 아시아 초연하는 자리였다. 플루트(다리아 빈코우스키), 첼로(아니 아즈나브리안), 피아노(폴 살레니), 타악기(알렉스 리포우스키) 연주자가 각자 자리에 앉고, 배우 윤여정씨가 낭독을 위해 무대 한복판에 올라온 뒤에야 신 학장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피아니스트의 바로 옆 자리, 악보를 넘겨준다는 뜻으로 흔히 속칭 '넘순이'로도 불리는 페이지 터너(page-turner)를 자청한 것이었다. 눈마을홀에 모인 600여 청중도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46세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 앤 섹스턴(Sexton)이 훗날 마흔이 될 딸을 떠올리면서 비행기에서 급히 적어 내려간 편지를 윤여정씨는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읽어나갔다. 덕분에 이 날 청중의 가장 큰 박수는 윤씨에게 쏟아졌다.
연주가 끝난 뒤, 신 학장은 "20년 지기(知己)인 윤씨가 연극 무대나 TV 브라운관이 아니라 음악회 무대에 선다기에, 내가 곁에 있으면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될까봐 자청했다"며 웃었다.
음대 학장이 우정을 위해 페이지터너를 자청하고, 낯선 아시아 초연 곡이 따뜻한 환호를 받고, 배우가 연주자들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즐거워하고…. 오로지 대관령에서만 볼 수 있는 음악 풍경들이다.
◆관악의, 관악에 의한, 관악을 위한

장대비가 쏟아진 12일 제주도 문예회관. 오전 11시부터 대극장에서는 트럼펫과 트롬본, 호른과 튜바의 관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난 2000년 그래미 상을 수상한 미국의 명문 관악 밴드 '체스트넛 브라스 컴퍼니(Chestnut Brass Company)'가 〈11시 콘서트〉를 자청한 것이다. 1815년 무렵의 옛 관악기부터 현대 음악까지 시간과 공간을 거침 없이 넘나드는 '관악 여행'에 공연은 관악기 전시장이자 동시에 음악 교육 프로그램이 됐다.
제주국제관악제의 개막식이 열린 이 날, 제주도에서는 하루 종일 실내와 실외를 옮겨가며 '관악 게릴라 콘서트'가 열렸다. 오후 3시에는 제주도문예회관에서 광양·동광 초등학교 합주팀이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주제곡 등을 고사리 손으로 연주했고, 오후 5시에는 협재 해수욕장 인근의 한림 공원에서 미국의 산루이스 오비스포 관악 오케스트라가 '아리랑'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들려줬다.
오후 8시, 해 저문 바닷가의 제주해변공연장에서 독일의 청소년 관악팀인 피닉스 파운데이션이 기타·베이스·피아노·드럼 반주에 맞춰 화려한 빅밴드 연주를 선보이자 여학생들의 환호와 사랑이 쏟아졌다.
30세 이하 젊은 관악 학도를 위한 국제 관악 콩쿠르까지 함께 열면서, 올해 이 음악제는 한국·일본·미국·독일·헝가리·프랑스 등 세계 10개국에서 27개팀 1300여 명이 참가할 정도로 훌쩍 성장했다. 윌리엄 존슨(Johnson) 국제 심포닉 밴드 협회 전 회장은 "세계에도 관악 전문 콩쿠르는 그리 많지 않다. 네덜란드의 케르크라데, 스페인의 발렌시아와 더불어 제주는 세계 3대 관악 콩쿠르로 충분히 자리 잡을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