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 글=김아형(월간 scenePLAYBILL 기자)
  • 사진=정형우

입력 : 2008.08.07 09:21

뮤지컬 배우 김지현

4년 전,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일본의 대형 극단 시키(四季)의 오디션을 치르던 서울예대 학생들을 찍은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지독한 훈련과정을 거친 오디션의 마지막 날, 모두가 함께 준비한 '라이온 킹'의 ‘Circle of Life’가 시작되자 어디선가 아름다운 코러스가 깔렸다.

바로 심사위원석에 앉아있던 극단 시키 최초의 한국인 배우 김지현의 목소리였다. 후배들의 곁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흘리던 눈물을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흘러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들은 곳은 '라이온 킹'의 제작 발표회장. 그녀는 역시나 ‘circle of life’를 불렀다. 그리고 머잖아 무대에서 만날 줄 알았던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까지는 2년의 시간이 더 지나야 했다.

그녀가 돌아왔다

한 번 들으면 좀처럼 잊기 힘든 독특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그녀보다 먼저 스튜디오를 열고 들어섰다. 가뜩이나 마른 몸이 더 야윈 듯 했지만 그 몸 곳곳에서 배어나오는 생기와 설렘을 감추기에는 부족했다.

꿈을 위해 13년 전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갔던 김지현, 그녀가 다시 한 번 꿈을 위해 바다를 건너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 뮤지컬의 제국이라 불리는 극단 시키의 수석 배우이자 최초의 한국인 배우로 '캣츠'의 그리자벨라와 '라이온 킹'의 라피키 역으로 각각 800회 이상 무대에 선 그녀의 화려한 이력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10년간 일본의 무대에서 일본어로 완벽하게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기까지 그녀가 흘려야 했던 땀방울과 눈물을, 그리고 그렇게 보낸 10년을 뒤로 하고 시키의 성문을 나와야했던 사정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내가 만든 상황은 아니지만 선택은 내가 했어요. '라이온 킹'의 한국 진출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만 둘 수 있는 계기를 얻은 셈이죠.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10년을 한결같이 지켜주던 튼튼한 울타리 밖으로 나오며 분명 두려움도 많았어요. 그동안 인터뷰 꺼렸던 것도 내 말 한마디가 오역될 소지 많기 때문이었어요. 시간은 걸려도 실수 없이 모든 걸 만들어가고 싶었거든요.”

김지현이 극단 시키를 나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한 번에 제안이 들어온 작품만도 8개. 그 중에는 욕심나는 작품도 있었지만 김지현은 선뜻 응하지 않고 잠시 미뤄 둔다.

'라이온 킹'이 한국 공연을 하고 있는 동안은 부딪히고 싶지 않았고, '라이온 킹'의 성공을 보고 난 후에야 움직여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녀였기에. 2년간의 기다림 끝에 김지현이 집어든 대본이 뮤지컬 '시카고' 라니 의외의 결과였다.

“신시뮤지컬 컴퍼니의 박명성 대표님께서 작년부터 같이하자고 제안을 하셨어요. 처음에는 저와 안 맞는 작품이라 여겨서 생각하고 말고도 없었죠.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는데 또 한 번 제안을 하시는 거예요. 그제야 진지한 듯 하지만 코믹한 요소도 많은 벨마란 캐릭터의 매력이 보이더라고요. 유일하게 객석에 말을 걸고 분위기를 이끌기도 하죠.”

'시카고' 는 1920년대 재즈 선율과 갱 문화가 발달한 시카고를 배역으로 록시와 벨마라는 두 여죄수를 통해 쇼비지니스 계의 생리, 성공을 향한 열망, 살인과 협잡을 그린 관능적이고 세련된 뮤지컬로 밥 포시의 안무가 돋보인다.

노래로는 명성이 자자한 김지현이기에 한국에서의 첫 무대는 역시 감정의 클라이막스를 실은 노래가 될 줄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빠른 시간에 강도 높은 밥 포시의 안무를 마스터하라는 지침이 주어졌다. 몸은 힘들었지만 좋은 멤버들과 공고동락하며 그녀는 '시카고' 를 통해 배우고 얻은 게 너무 많다고 말한다.

“지난 토요일에 첫 공연을 했는데 ‘더 할 수 있었다’는 데에 대한 아쉬움이 컸어요. 특히 첫날이라고 일부러 온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가장 대조 되는 건 관객이에요. 일본 관객은 신중하고 예민한데 반해 한국 관객들은 열정적인 반응을 숨기지 않고 무대의 배우에게 돌려주더라고요. 저를 모르는 관객에게도 제 무대가 궁금한 관객에게도 배우 김지현은 감동을 줄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불가능이란 없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영혼이 살아있지 않으면 감동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김지현. 좋아서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법이다.

그녀에게 일본에서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준 김효경 교수님과 가는 곳마다 만났던 인생의 좋은 스승을 인간적인 멘토 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상하리만큼 첫 단추부터 끼우기 힘든 역을 많이 했어요. 라피키 역시 굉장히 힘들게 적응한 배역인데 지니고 보니 이 역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때는 춤이 주인 배우였어요. 서울예술단에서 '장보고'를 할 때인데 얼마나 안무가 힘들고 어렵던지 탈진할까봐 연습이 끝나면 소금을 먹기도 했었죠. 그래서 '시카고' 안무에 나오는 덤블링이나 옆돌기도 무리 없이 할 수 있겠더라고요. (웃음)”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기 전 서울예술단 객원단원을 지낸 김지현은 '아가씨와 건달들', '장보고', '웨스트사이드스토리' 등의 국내 뮤지컬 무대에도 출현한 바 있다.

학창시절 성악과를 가려고 레슨을 받았지만 육성이 강한 목소리 톤은 선생님들도 조차 그녀의 음역대를 어떤 때는 소프라노, 어떤 때는 알토로 매번 다르게 잡았다고 한다.

보통 고음에 강한 사람은 저음을 못내는 데 반해 그녀는 고음과 저음을 무리 없이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노래를 부른다.

“그런 제가 라피키를 하는 동안 성대 결절이 6번이나 왔어요. 시키에 있을 때 오늘은 '라이온 킹', 내일은 '캣츠', 모레는 '지저스', 그 다음 날은 '송 앤 댄스'... 정말 매일이 다른 작품, 다른 무대에 오른 적도 있었어요. 때문에 이미 성대에 결절이 왔지만 무대를 구멍 낼 수는 없고 결절상태로 '라이온 킹'을 하면서 결절을 고쳤죠. 당사자인 저 역시도 안 믿겨지는데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니까 또 하는 게 인간이더라고요.”

일본에서 뮤지컬 '아이다'의 공연을 앞두고 의상 피팅까지 한창 연습 중이던 그녀는 ‘시키’의 성 밖으로 나갔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간이 더 지나서 '맘마미아'의 도나 역도 해보고 싶고,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으로 경험도 더 쌓고. 내가 그 역할에 충실하고 솔직하다면 솔직한 무대를 받아 주시리라 믿어요. 뮤지컬과 쇼는 또 다른 영역이니까요”

“시키를 나와서 제가 운영하는 공연기획사를 만들었어요. 학생들을 가르치고 11월에 있을 콘서트 미팅을 하고... 1년 한 번 제가 직접 콘서트를 주최하는데 지난해는 극단 시키의 배우들이 함께 했었죠. 이번에는 한국 배우들도 게스트로 초청할 생각인데 첫 타자를 고영빈 씨로 정했어요.”

처음에 팬 250명 정도가 모이던 작은 콘서트는 지난해에는 1000명 정도가 신주쿠 공연장에 모여 김지현이 부르는 뮤지컬 넘버와 가스펠에 푹 빠져들었다.

그녀는 어느 샌가 70명이 모인 가스펠 팀을 결성, 1년에 한번 콘서트 무대에 서는 것 목표로 삼고 있다. 또 코러스 팀도 만들어 실버타운 등에 봉사활동을 갈 생각이다.

“올해는 10월에 '시카고'의 지방 공연까지 마치고 나면 11월에 있을 콘서트에 매진해야 해요. 내 나라 한국에서 저를 응원해주는 분들이 있으시면 그 무대는 지속해서 서야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좋은 일들도 있지 않을까요. 내 무대, 내 노래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베풀 수만 있다면 계속 그렇게 살고 싶어요.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편안한 느낌이 가득한 힐링(healing) 음반도 낼 거고요. 아직 스스로에 대한, 김지현이라는 배우에 대한 자기 발견이 부족해요 일본에서 사는 동안 저는 저를 마음껏 발산하지 못했던 대신 내면에 충실할 수 있었어요. 이제 그동안 닫아두었던 나를 열고 내가 모르는 나를 찾으려는 시도들을 해보려고요.”

그동안 감춰두었던, 절제 해왔던 ‘끼’를 하나씩 꺼내놓겠다는 김지현. 당분간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활동을 해야 하는 그녀는 놓는 순간 자유로워진다는 깨달음 하나를 남겨두고는 서둘러 극장으로 향했다.

“일본에 가서 나이를 먹다보니 노래만 부르는 역할만 계속 주어지더라고요. 그렇다면 나는 이제 노래로 굳는 건가, 그렇게 춤을 포기한 순간, 어떤 작품보다 움직임이 많은 '시카고' 가 찾아왔어요. 내가 놓았을 때 기회는 왔어요. 꼭 하고 싶다 집착하면 오다가도 가는 게 기회이거든요.”


뮤지컬 '시카고'
일시 7월 23일~8월 30일 평일 8시 / 토 일 공휴일 3시, 7시 30분 
장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문의 02-577-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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