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싣고 달리던 곳, 이젠 예술 싣고 달린다

  • 김경은 기자
  • 임지영 인턴기자(중앙대 국문과 4년)
  • 이혜수 인턴기자(존스홉킨스대 신경과학 전공 2년)

입력 : 2008.08.05 03:06

● 전시회 열리는 서울역 구역사는

붉은 벽돌 외벽과 비잔틴식 돔, 드높은 궁륭으로 햇빛이 드는 메인홀,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양식당, 철마(鐵馬)가 수증기를 뿜는 승강장…. 1925년 문을 연 서울역 구역사(舊驛舍)는 당시 사람들에게 '최첨단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근대건축의 걸작이자 한국인의 눈물과 웃음이 깃든 서울역 구역사에서 6~17일 《아시아프》(아시아 대학생·청년작가 미술축제)가 열린다.

서울역 구역사 자리에는 원래 1900년에 건설된 '남대문역'이 있었다. 1920년대 초 경성 인구가 30만 명을 돌파하자 1925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현재의 건물을 짓고 '경성역'으로 명명했다.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 도쿄대 교수가 설계했다.

김정동(60) 목원대 건축학부 교수는 "경성역은 조선 사람에게는 충격이었고, 일본인들은 '동양 제 1역은 도쿄역, 제 2역은 경성역'이라고 으스댔다"고 했다. 은행원 한 달 봉급이 70원이던 시절 경성역의 하루 매표 수입은 1만원, 하루 이용 승객은 1만5000여 명이었다.

역사 2층 양식당에서는 조선의 갑부들이 은식기로 정찬을 즐겼다. 1층 '티이루움'(찻집)에서는 조선의 모던보이들이 '도시의 고독'에 젖었다. 이상의 소설 《날개》의 주인공이 바로 이곳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며 '(승객들이 바삐 지나가는) 서글픈 분위기가 절실하고 마음에 든다'고 했다.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주인공도 승객이 빽빽한 대합실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고독감을 곱씹었다.
《아시아프》개막을 이틀 앞둔 4일 오후, 한국 현대미술을 이끌어 갈 젊은 작가들이 서울역 구역사(舊驛舍)에 마련된 전시장에 작품을 걸고 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플랫폼에서는 일본 유학생들이 부산행 열차에 올랐고, 태평양전쟁이 격화된 1940년대에는 조선의 부모들이 징병열차에 오른 아들의 이름을 목메어 불렀다.

광복 후 경성역은 '서울역'이 됐다. 6·25 와중엔 폭격으로 메인홀 천장과 플랫폼 일부가 파괴됐다가 복구됐다. 서울역은 이후 신생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지켜본 증인이었다. 1960년 설 연휴를 이틀 앞두고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려던 승객들이 계단에서 우르르 넘어져 31명이 압사하고 40여 명이 다쳤다. 1985년 태풍으로 돔이 부서지자 철도청이 돔을 전부 해체해서 새로운 동판을 씌웠다.

에피소드도 많았다. 1969년 서울역 매표소 남자 직원들이 암표를 팔다 적발되자 철도청장이 매표소 직원을 전원 여성으로 교체했다. 철도청이 선남선녀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미팅열차'를 운영했다가 '풍기문란'이라는 반대 여론에 밀려 서둘러 운행을 중단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고교 3학년 실습생이 조종실에서 포르노 비디오를 보다가 스위치를 잘못 켜는 바람에 대합실에 10분간 포르노가 중계돼, 승객 항의가 빗발쳤다.

이렇듯 숱한 영광과 애환이 깃들인 서울역 구역사는 2003년 고속철(KTX) 민자 역사가 문을 열면서 폐쇄됐다. 《아시아프》가 끝난 뒤 원형 복원공사를 거쳐 2010년 상반기에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 계획이다.

따라서 《아시아프》는 서울역 구역사의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접점이다. 복원 공사에 앞서 서울역 구역사의 옛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동시에 대규모 전시를 즐길 수 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앞으로 이곳을 적극 활용하면 국민들에게 기차 여행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축제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