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7.23 09:24 | 수정 : 2008.07.24 11:06
배우 박인환
아마추어리즘이 좋다
그가 환갑을 넘긴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건 의외였다. 브라운관을 통해 보아온 그의 모습은 늘 누군가의 나이든 아버지였으니까.
“한창 무대를 누비던 20대부터 우리네 노인, 서양 노인 가리지 않고 연기했으니까 어쩔 수 없죠. 젊은 역할 기회도 많이 없었지만 못한다고 뭐라는 사람도 없었어요. 연기라는 게 작품의 인물을 살아있게 표현했느냐에 따라 관객과 공감대가 형성되는 건데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는 모르겠어요. 이제 분장, 과장, 포장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되다보니 폭발보다는 억제하는 연기를 하게 되요.”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다른 제안들을 전부 뒤로 하고 박인환은 연극 '침향'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제1회 차범석 희곡상’ 당선작인 '침향'은 ‘이념으로 갈라진 한국 현대사를 화해로 풀어놓은 수작’이라는 평을 받은 희곡으로 그가 연기하는 강수란 인물이 6·25때 월북해 56년 만에 귀향하면서 벌어진 며칠간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연극 작업은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그렇지 보람 있잖아요. 차범석 선생으로부터 연극인이 가져야할 자세를 많이 배웠거든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아서 시상식 때부터 참여 의사를 밝혔죠.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단순해져서 그런지 포장이나 겉멋을 부린 작품보다는 심플하지만 단단한 작품에 눈이 가는데 이 작품이 그렇더라고요.”
연극 '침향'에는 박인환 외에도 김길호, 박정자, 박웅, 손숙, 정동환 등 한국 연극사를 이끌어온 걸출한 중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일찍부터 화제를 모았다. 느린 호흡의 연극이지만 오랜만에 연극의 본질에 충실한 작품을 통해 희미해져 가던 연극정신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연극판에 오면 고향처럼 푸근해서 좋아요. 연극하는 사람들 대부분 훈훈하고 소박하거든. 방송국에서는 가족 같은 팀웍는 바랄 수가 없어요. 다 같이 연습하고 다 같이 밥 먹고 동고동락하던 연극하던 시절이 늘 그립지요. 한창 연극에 빠져있던 1960년대에는 연극하고 출연료를 못 받더라도 밥 사주고 술 사주면 더 바랄 게 없었죠. 지금이야 이쪽도 많이 전문화되어서 논리적이고 계산적이 되었다지만 그때 그 아마추어리즘이 남아있거든요.”
낮은 목소리로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박인환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연극배우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 무렵의 그는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최우수연기상(1978년)을 비롯해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1980년) 등 굵직한 연극 상들을 수상했고, 특히 백상예술대상을 세 차례나 수상하는 등 당시 연극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박인환은 ‘여러 차례 상을 탔던 것도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거듭 자신을 낮춘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 등 번역극을 많이 했던 연극 생활 초반 그는 극단 ‘가교’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연극들을 많이 접했다. “극단 가교는 중앙대, 동국대, 한양대의 연극영화과 학생들을 주축으로 1969년부터 활동한 집단이에요. 윤문식, 최주봉, 김진태 등이 동고동락한 사이죠. 당시에는 관객을 직접 찾아다니며 천막극장도 고사하고 만리포 해수욕장과 도봉산에서도 공연을 했어요. '포기와 베스', '판타스틱스' 등 뮤지컬도 많이 했고요. '태풍'이란 작품으로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첫 개인상을 받았는데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 중이라 분장을 한 채로 상을 받으러 간적도 있고…, 에피소드야 셀 수 없이 많죠.(웃음) 연극 밖에 모르고 살던 그때는 ‘과연 될 것인가’ 하는 우려도 많았고 당장의 생활고 앞에 좌절도 많이 했지만 내 안에는 작은 희망이 있었어요.”
1년에 일곱 작품을 한 적도 있으니‘밥 먹고 연극밖에 안했다’는 표현이 과장은 아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할 만큼 했으니 그만 철들어라’, ‘연극이 직업이 될 수는 없다’며 만류도 많았다. “문예진흥원 지원으로 뉴욕과 런던에 6개월 연수를 가게 된 적이 있어요. 외국에 나가서 보니까 연극배우, 영화배우, 탤런트의 사이에 경계라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연극만 고집한다는 건 낡은 생각이라는 마음을 먹고 TV를 시작하게 됐죠.”
연극은 나의 힘
연기자는 필요에 의해 선택받는 직업. 혹자는 칼자루와 칼날로 비유하고, 혹자는 도마 위의 생선에 비유한다. 자기관리만 철저하다면 정년퇴직도 없지만 작품이 항상 보장된 게 아니다 보니 박인환은 스스로를 ‘비싼 일용직 노동자’ 같다고 말한다.
“내가 원한다고 TV에서 ‘어서 오세요’ 하는 게 아니잖아요. 볼 때는 쉬워보였는데 풍토가 달라도 너무 다르더라고요.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다보니 대사 몇 마디가 왜 그렇게 힘들던지… 역시 나는 무대에 서야할 팔자인가싶어서 관둘 생각도 많이 했는데 아내가 말렸죠. 당신 선배들도 다 겪은 과정이라고. 방법이 없잖아요. 내가 극복하는 수밖에.”
박인환은 ‘연극, TV를 오가며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장민호 선생과 신구 선배 정도’라며 본인은 그저 운이 좋아서 20년을 버텼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겸양과 달리, 그는 지난 20년 동안 몰려드는 다양한 배역들로 1주일을 편하게 쉬어본 기억이 없다. 환갑이 넘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연극으로 시작했으니 연극으로 마무리할 것이라는 소신을 털어놓는 박인환. 자신의 정신적 고향은 연극이지만 고향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목가적인 풍경 속에 아픈 기억이 숨어 있듯 고생하며 수십 년간 지켜온 연극 작업이야말로 박인환을 오늘까지 지탱해준 힘이다. “그때 고생 안했으면 진작 포기했을 거예요. 연극은 그걸 견뎌내게 하는 힘을 길러줬어요. 독하게 연습하고 쫑파티 소주 한 잔에 ‘다음에 봅시다’란 말이 출연료를 대신한 적도 많지만 마약처럼 또 무대를 찾게 됐었죠. 그때 그 헝그리 정신이 문뜩 그리워지네요.”
그는 환경이나 조건을 따지기보다는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면 거기서 얻어지는 결과가 분명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워낙 내성적이라 나는 코미디는 절대 못할 줄 알았어요. 근데 해보니까 무지하게 재미있더라고요. 배우란 작품이 주어지면 표현해내야 하는 숙명을 갖고 있어요. 건달 역을 맡았다고 꼭 건달같이 살아 봐야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경험이 능사가 아니지만 경험에서 오는 노하우는 분명 있죠. 저 역시 연극에서 맡았던 다채로운 배역들 덕분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생경한 역을 만나더라도 얼마든지 응용을 할 수 있거든요.”
연극 안에서 꾸려온 삶은 해가 거듭할수록 연기에 더 많은 힘을 실어준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선배 연기자들을 보며 연기 인생의 수명을 연장시켜 본다. 그 나이까지 연기 인생을 꿈꾸는 건 배우로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자신을 필요로 하고 불러주는 이가 있는 한 그는 무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교육을 받거나 교훈을 얻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게 아니잖아요. 흥미를 찾고 재미를 위해 연극을 보러온 관객이 ‘나도 저럴 수 있겠구나’ 하며 공감하고 지나온 시간을 반추해 보며 마음에 휴식과 양식을 얻어 간다면 그보다 큰 연극의 기능은 없을 거예요.”
인터뷰 내내 운을 강조했지만 운이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를 보내지 않던가.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의 조각들과 무수히 흘렸던 노력의 땀방울이 모여 탄탄한 배우 박인환이 만들어진 것. 어떤 고비에도 연극을 놓지 않았던 굳은 심지야말로 그를 ‘운 좋은’ 배우로 만들어준 원동력이 아닐까.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