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7.21 03:07 | 수정 : 2008.07.21 06:20
연극 '원전유서'
지난 16일 밤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터져 나온 박수는 꼬리가 길었다. 4시간30분짜리 연극 《원전유서》(原典遺書) 초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보낸 '답장'이었다. 이런 커튼콜이 언제 있었는가 싶을 만큼 반응은 뜨거웠다.
연극평론가 김윤철은 "배삼식 이후 이만한 깊이와 넓이, 힘까지 좋은 극작가의 등장은 처음"이라고 했다. 극작가 이강백은 "논리와 감성이 혼재된 무대언어에 매료 당했다"며 "대본만으로는 논쟁이 일었지만 공연에 대해서는 평단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원전유서》는 벌써부터 올 연말 연극 관련 시상에서 유력한 수상 후보로 꼽히고 있다.
특히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뭇매를 맞은 어동이(윤금정)는 편지쓰기 숙제를 마치고 기진해 쓰러진다. "엄마, 몸이 딱딱해져 잠 와"가 그의 마지막 대사다. 엄마 어진네(김소희)는 웃옷을 벗어 죽은 아들을 덮어준다. 어동이 편지를 누군가 읽는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이 딱딱한 한글 자음이 합창이 되고 주문(呪文)이 된다. 어진네 텃밭에서는 상추가, 어동이를 묻은 쓰레기산에서는 소나무 한 그루가 올라온다. 어둠을 밀어내는 푸른빛이다.
연희단거리패의 《원전유서》(김지훈 작·이윤택 연출)는 긴 러닝타임으로 먼저 주목 받았다. 쓰레기 매립지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데 연극 3편 볼 만한 시간이 필요한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꽉 찼던 객석이 1막 이후 휴식시간에 절반쯤 비어버렸다면 이 작품은 실패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2막에도 '이탈자'는 소수였다. 시간을 견디는 밀도와 연극성을 입증한 셈이다.
무대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5t 트럭 3대 분량이다)로 객석을 압도한다. 남자들의 대사는 관념적이고 여자들은 구체적이다. 지식인 남전(이승헌)은 "육체의 대부분이 물인 것처럼 삶의 대부분은 긴장인데 이곳엔 긴장이 없다. 멍청히 앉아 늙어가고 있으니 감옥인 셈"이라며 혁명을 선동한다. 불구가 된 남편 대신 집을 차지한 사내의 폭력에 시달리는 어진네는 웃음으로 울음을 덮는다. 주민들은 지식인 남전을 중심으로 지번(地番)을 요구하고, '쓰레기가 돈 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매립지로 사람들이 몰려온다.
"오랫동안 대중극에 머물렀다"던 이윤택은 작가 김지훈(29)을 만나 초창기 《시민K》 등에서 보여준 도전적인 야성으로 돌아왔다. 쓰레기 더미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1000여개의 폐(廢)휴대전화를 무대에 쏟아 붓고, 쓰레기와 고물을 놓고 싸우는 장면은 거친 폭풍 같다. 텃밭에서 호미질하는 어진네, 공부하는 어동이를 그 그악스러운 아수라장과 대비시키는 연출도 좋다. 뼈만 남은 쓰레기산은 스산했다.
주연을 맡은 김소희·이승헌은 10여년 전 《햄릿》을 떠올리게 하는 연기로 중심을 잡아줬고, 신예 윤금정은 발견의 기쁨을 줬다. 어진네가 흙으로 상처를 문지르는 장면은 최근 우리 연극동네가 한동안 '대지의 모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잔상이 길었다.
▶21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02)763-1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