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7.11 09:30
배우 김지호와 함께한 연극 '라이프 인 더 씨어터'
'프루프'로 다시 한 번 노크!
짧은 커트머리에 씩씩한 목소리, 탤런트 김지호는 보이시한 매력으로 브라운관에 등장했다. 영문학을 전공하던 평범한 여대생은 단숨에 신세대 아이콘으로 떠올랐고, 그녀는 1990년대 중반 CF계를 석권하며 스타의 대열에 합류했다. 당시 유명한 영화를 패러디한 화장품 광고는 아직도 회자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데뷔 15년차, 그 사이 '꿈의 궁전', '유리 구두' 등의 TV드라마와 영화 '인연', '꼬리치는 남자'에 출연했으며, 2001년에 동료 탤런트 김호진과 결혼해 슬하에 딸 하나를 둔 김지호. 최근 높은 시청률로 종영한 MBC 아침 드라마 '그래도 좋아'에서 구두디자이너 이효은 역으로 안정적인 연기를 펼친 그녀가 올 여름, 연극 '프루프'(7.11-9.7)로 무대 복귀를 택했다.
“'클로져'에 이어 두 번째 연극이에요. 드라마 '그래도 좋아'는 시청률도 잘 나오고 진행 상황도 순조로웠지만, 그즈음이 제가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자세를 달리한 시기였어요. 더 좋은 배우,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계속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악어컴퍼니 조행덕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죠. 연극이 너무 하고 싶다고. 꼭 할 테니 저한테 어울리는 작품 좀 구해달라고 요청을 했죠. 그게 작년 11월이었어요.”
2000년 뉴욕에서 첫 공연을 올린 '프루프'는 당시 20년 만에 브로드웨이 최장기 연극으로 기록됐으며, 이듬해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포함해 8개 시상식의 상을 휩쓸었던 작품.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시에게서 모티프를 따온 '프루프'는 천재 수학자였지만 정신분열로 비참한 말년을 보낸 아버지 로버트를 간호했던 딸 캐서린의 불안정한 심리와 주변인들과의 갈등을 짜임새 있게 전개시킨 연극이다. 국내에서는 2003년 추상미, 장영남이 주인공을 맡으며 처음 소개되었고, 2005년에 이어 3번째 공연을 앞두고 있다.
“2003년에 남편과 TV드라마 '노란손수건'으로 인연을 맺었던 (추)상미언니의 공연을 봤었죠. 당시엔 제가 임신 중이어서 2시간 동안 객석에 앉아 있기가 조금 버거웠고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상미언니의 연기에 감탄을 하며 봤었죠. 퇴장도 거의 없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이 대단하더라고요.”
이후 기네스 팰트로우, 안소니 홉킨스가 호흡을 맞춘 영화 '프루프'를 보면서 작품의 매력을 다시금 느끼게 된 김지호는 시종일관 짜증과 신경질로 타인을 대하는 캐서린이란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감으로 희곡을 펼치게 되었다.
“5년간 아버지의 병수발을 도맡았고, 그의 죽음 이후 혼란한 상태에 빠진 캐서린의 정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꼼꼼히 행간을 오가다보니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작품이더라고요.” 연습을 하면 할수록 발견되는 풍성한 깊이와 재미에 참여하는 배우들은 모두 작품의 매력에 빠졌다며, 실제 무대에선 이 같은 느낌이 어떻게 표현될지 무척 기대가 된다는 그녀. '프루프'에 대해 누구보다 하고픈 말이 많은 그녀와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배우들의 삶을 그린 '라이프 인 더 씨어터'의 티켓을 손에 쥔 채로.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는 무대, 그리고 인생
무대를 배경으로 한 컷을 촬영하기 위해 공연장으로 들어서자 리허설을 위해 미리 도착해있던 배우 이순재와 홍경인이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특히 TV드라마 '꿈의 궁전'을 통해 인연을 맺은 선배 이순재는 “우리 지호가 왔구나!”라며 연습도 제쳐둔 채,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소소한 일상을 묻고 작품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곁들였다.
연극 '라이프 인 더 씨어터'는 제목 그대로 ‘극장 안에서 펼쳐지는 인생’ 이야기로, 인생의 퇴장을 앞둔 늙은 배우와 스타로 유명세를 얻어가는 젊은 배우의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1997년 시카고에서 초연된 이래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명망 높은 원로급 배우와 청춘스타들이 캐스팅되어 화제를 모은 연극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연되는 이 작품에는 이순재, 전국환, 장현성, 홍경인이 참여했으며, 황재헌 연출가가 대학 시절 썼던 6개의 ‘극중극’이 장면의 사이를 이어주며 보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배우들의 목소리를 강조하는 부분, 상호간에 앙상블이 이뤄져야 작품이 완성된다는 대사가 너무나 와 닿네요.” '라이프 인 더 씨어터'에는 선배가 후배에게 배우로서 갖춰야 할 태도나 예술의 본질에 대해 충고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고 이러한 부분에서 김지호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누구보다 연극, 배우, 인생이란 키워드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이기에.
“극중에서 처음엔 선배를 존경하다가 유명세를 얻으면서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후배를 보니까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네요. 배우란 그런 실수를 저지를 여지가 참 많은 직업이거든요. 그리고 후반부에 선배 배우가 평생 그토록 하고 싶었던 햄릿 역할을, 아끼는 후배가 연습하는 장면만이라도 보고 싶어 연습실에 들렀다가 자살을 기도하는 모습에서 가슴이 저릿해졌어요. 나이 듦에 따라 무대와 인생에서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현실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서 마음이 참 아파요.”
막이 내리자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본래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김지호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피로 회복 음료를 들고 대기실로 직행했다. '라이프 인 더 씨어터'는 2인극인 만큼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력과 완벽한 호흡이 필수적인 작품. 이순재의 연륜과 홍경인의 감각이 빚어낸 유쾌하고도 진솔한 인생 이야기에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공연장을 나섰다.
무대에서 찾은 배우의 길
데뷔 이래로 많은 TV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연기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희곡이나 대본을 분석할 기회가 없었던 그녀는 '클로져'를 연습하면서 연기와 극의 매력을 새삼 알아갔다. “첫 작품으로 '클로져'를 만나는 바람에 연극에 발목 잡혔죠(웃음). 이 작품의 대본이 너무 재밌잖아요. 연구할수록 ‘작가가 천재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본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어요. 당시엔 몸이 안 좋다가도 연습실에만 들어서면 너무 신났을 정도였죠.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해보고 싶어요.”
'라이프 인 더 씨어터'의 공연장이 그녀가 연극 무대에 데뷔했던 장소이기도 해 그때의 감회에 젖어든 김지호는 '클로져'를 함께 했던 연극배우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태희’ 역할로 함께 캐스팅되었던 박수민과는 동료 이상의 각별한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의 엉뚱한 구석이 의외로 저랑 잘 맞아요. 어떤 날은 말도 안 되는 인생 이야기를 하루 종일 하기도 하고, ‘날씨 너무 좋다. 라디오 93.1Mhz 틀어봐라’ 이러면서 전화하기도 하고. 일터에서 너무나 좋은 동생, 소중한 친구를 만났죠.”
남명렬, 이경선, 서은경, 정원조 등 '프루프'의 배우들과도 따뜻하고 진실한 관계가 될 것임을 그녀는 믿는다. 최근 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인들이 연극,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하는 유행에 편승하여 '프루프'를 택한 게 아니라는 김지호. 진심으로 무대가 그립고 연기의 진정성을 깨닫고 싶어서 연극을 다시 찾은 그녀가, 그토록 갈급했던 부분을 채워나가며 훌륭한 배우로 거듭날 수 있기를. 심장이 터지도록 떨렸던 첫 무대의 긴장과, 전율을 느낄 만큼 황홀했던 관객들의 갈채를 고스란히 기억한 그녀라면 가능한 일이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