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7.08 03:11
그림은 나의 힘 [3]가수 한대수 인터뷰
귀국 직전까지 그는 뉴욕사진학교에 다녔다. 카메라를 메고 맨해튼을 쏘다니다가 틈이 나면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들러 몇 시간씩 잭슨 폴락(Pollock·1912~1956)의 추상화를 바라봤다. 폴락은 캔버스에 물감을 흩뿌리고 들이붓고 뚝뚝 흘리는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로 현대미술사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 사내다.
"절박하니까 하는 게 예술이에요. 마음 속에 들끓는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 느낌. 폴락은 격렬한 사람이었어요. 그림에 그게 나타나. 답답해서 붓질을 할 수 없었던 거야. 마음이 폭발할 것 같으니까. 그것도 아주 혁명적으로 혼돈스러우니까."
서울 신촌에 있는 한대수(60)씨 집은 눈길 닿는 곳마다 책과 음반이 쌓여있었다. 발 밑엔 장난감이 밟혔다. 어린 딸(1)을 어르는 짬짬이 한씨는 양파와 고기를 썰어 프라이팬에 볶고 차가운 맥주를 꺼냈다. 폴락 얘기가 나오자 그는 "얼핏 보면 물감을 떡칠한 것 같은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미세한 부분까지 완벽한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며 "위대한 작가"라고 흥분했다.
"그는 자기 내면의 카오스를 혁명적인 방법으로 표현했고, 그걸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고통과 고독을 덜어줬어요. 그런 점이 나를 뒤흔들고, 내 음악에 깊은 영향을 줬지요. 나도 황량하고 혼돈스러웠으니까요."
음악인들은 한씨를 '한국 포크록의 대부'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작 한씨는 인생의 대부분을 음악이 아니라 사진으로 밥을 먹었다. 1집 앨범 《멀고 먼 길(1974)》과 2집 《고무신(1975)》이 연달아 방송 금지 처분을 받은 뒤 그는 뉴욕으로 돌아갔고, 2002년 귀국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성공한 광고 사진가로 바쁜 삶을 살았다.
한씨는 "사촌형제 아홉 명 중에 물리학자가 셋"이라며 "우리 집에 장발 히피는 나밖에 없다"고 껄껄 웃었다. 그는 유복한 집에서 외롭게 자랐다. 미국에 유학간 아버지가 가족과 연을 끊고 잠적한 것이 화근이었다. 젊은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시댁에 남겨두고 재가했다.
한씨는 할아버지 손에 컸다. 연세대 신학대학장을 지낸 할아버지는 바흐를 좋아하는 아마추어 사진가였다. 한씨가 아버지와 연락이 닿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10여 년간 행방을 모르고 지낸 아버지는 미국 뉴욕 근교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한씨는 아버지 집에 가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뉴욕사진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와 다시 만난 뒤에도 서먹한 응어리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씨는 폴락의 그림을 보러 다니고, 골방에서 작곡을 하는 것으로 분노와 슬픔을 풀었다. 그는 "내가 불행할 때 작곡한 〈행복의 나라로〉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줬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며 "예술은 무릇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태어나고 사는 게 다 고통이지. 누구나 매일 같이 관계에 치이고, 괴로운 마음으로 출퇴근하고, 아귀다툼을 하잖아요. 인간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예술에 관심을 돌리지요. 그런데 작가도 불행해서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거든. 불행의 산물인 예술이 관객의 마음을 달래줘요. 재미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