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거인이 연주하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의 몰아침"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6.28 03:21

프랑스 파이프 오르간의 대가 미셸 부바르 내한 공연

공연의 막이 오르면 대개 무대 한복판에 불이 켜진다. 하지만 26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만큼은 2층 오른쪽 박스에 환한 조명이 집중됐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고개를 모두 오른쪽으로 돌리고 자세를 고쳐 앉아야 했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파이프 오르간이 모처럼 기지개를 활짝 편 것이다. 이 극장 파이프 오르간 설치 30주년을 맞아서, 프랑스 툴루즈의 생 세르넹 성당 오르가니스트인 미셸 부바르(Bouvard)가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를 열었다.

공연 1시간 30분 내내 부바르는 객석과 등 돌린 채 오로지 건반만을 바라보며 연주했고, 관객들은 이 등돌린 연주자를 마치 운전사의 등을 쳐다보듯 지켜보았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조인형 성공회대 교수(한국 오르가니스트협회 이사장)는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는 자동차 운전도 잘할 것"이라고 위트 있게 말했다. 이 날 청중은 파이프 오르간이라는 대형 버스에 승차한 승객이 된 셈이었다.

98개의 오르간 스톱과 8098개의 파이프, 6단에 이르는 손 건반이 주는 시각적 효과 못지 않게, 파이프 오르간은 그 음량만으로도 언제나 청각적으로 듣는 이들을 압도한다. 하지만 조 교수는 "눈 감고 오르간 연주를 듣노라면 숲 속의 바람 소리와 같은 고요함이 있고, 때로는 마치 거인이 연주하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의 몰아침도 있다. 파이프 오르간에는 온갖 자연의 소리가 다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세속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곡마저 때로는 종교적으로 들린다는 것이야말로 파이프 오르간의 매력인지 모른다.
26일 프랑스 오르가니스트 미셸 부바르의 연주회가 열렸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파이프 오르간. 1978년 설치해서 올해 30년을 맞은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설치 당시 제작비만 6억원, 제작기간 13개월, 무게 45t에 이르는 초대형 악기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날 프로그램은 16~17세기 프랑스 작곡가 오스타시 뒤 코루아(Du Caurroy)의 〈작은 소녀 선율에 의한 다섯 개의 판타지〉로 출발해서 니콜라 드 그리니, 요한 세바스찬 바흐, 멘델스존과 세자르 프랑크를 거쳐 20세기 음악까지 시대순으로 내려오며, 파이프 오르간 작품의 변모를 살필 수 있게끔 촘촘하게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파이프 오르간의 '시간 여행'이 된 셈이었다.

2부 후반부는 연주자의 할아버지인 장 부바르의 〈바스크 지방의 노엘 선율에 의한 변주곡〉과 루이 비에른의 〈웨스트민스터의 종소리〉로 마무리했다. 앞 곡에서는 민속 음악 풍의 선율을 변주하며 소박하고 따뜻한 이 악기의 또 다른 음색을 보였고, 뒤의 곡에서는 흔히 수업이나 경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데 쓰이는 런던 빅 벤(Big Ben)의 종소리 선율을 바탕으로 화려한 색채감을 여지 없이 드러냈다. 오케스트라 무대로는 다소 크고, 오페라 공연에는 무대 전환 등이 불편했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숨겨진 매력을 드러낸 자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