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괴짜'는 '황제'를 만나 어떻게 소통했나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6.26 03:17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왼쪽)와 지휘자 카라얀. /소니BMG 제공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와 '괴짜'가 만났습니다. 1957년 5월 24일 독일 베를린입니다. 당시 베를린 필을 이끌고 있던 지휘자 카라얀(Karajan)은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ould)를 초청,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사흘간 협연합니다.

굴드는 이후 32세에 콘서트 무대에서 은퇴한 뒤 녹음과 방송을 통해서만 활동했습니다. 은둔자를 자청하기 7년 전의 콘서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것일까요. 굴드는 "카라얀은 눈 감고 연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지휘봉은 엄청난 호소력을 지니며 춤추듯 움직였고, 내 삶에 지울 수 없는 음악적이고 극적인 경험을 안겨주었다"고 회고합니다. 마찬가지로 훗날 카라얀도 "다음 세대에게 (굴드는) 음악적으로 빼어난 연주 솜씨와 비범한 취향을 겸비한 걸출한 음악가로 남을 것이다. 그는 미래로 열려있는 양식을 창조했다"고 격찬합니다. 당시 실황이 최근 음반(소니BMG)으로 국내에 소개됐습니다.

굴드는 무대에서 은퇴한 뒤인 1976년 카라얀과의 '가상 협연'을 기획하기도 합니다. "카라얀과 굴드가 가능하면 전화로 해석·템포·다이내믹·균형 등 중요한 모든 요소에 대해 이야기한 뒤 ▲굴드가 먼저 독주 파트를 담은 마스터 테이프를 제작하면 ▲카라얀이 여기에 기초해서 관현악 파트를 녹음한다"는 것입니다.

굴드는 "카라얀과 실제로는 만나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반대로 결과는 지독하게 끔찍할 수도 있다"고 익살스럽게 말했습니다. 피터 오스왈드의 평전 《글렌 굴드》(을유문화사)에 따르면, 실제 굴드는 1978년 피아노 부분을 먼저 녹음한 뒤 카라얀에게 관현악을 집어넣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카라얀은 그 작업 방식을 거절했다고 하네요.

굴드를 따라다니는 에피소드는 적지 않습니다. 늘 연주용 의자를 갖고 다니고, 한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있으며, 연주하기 전에는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하지만 굴드의 인터뷰와 메모 등을 모은 책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모노폴리)에서 그는 담담한 어조로 괴벽에 얽힌 사연들을 풀어놓습니다. 의자를 갖고 다니는 것은 "단지 내 연주 스타일이 다른 피아니스트보다 20㎝는 낮게 앉아서 연주하기 때문"이고, 장갑을 끼거나 손을 담그는 건 "냉방으로 북극처럼 추워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혈액 순환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른 은퇴에 대해서도 굴드는 "나보다 훨씬 피아노를 잘 친다고 여기는 17세의 젊은이들을 상대로 잔혹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경쟁이란 몸을 던질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때로는 조작되거나 과장된 신화가 평범한 진실보다 훨씬 흥미롭습니다. 진심으로 이해하려 하기 이전에, 얼마나 우리는 손쉽게 상대를 단정지어 버리는지요. "내 독특한, 괴짜 같은 행동으로 불리는 것들로 인해 사람들이 내 연주의 진지한 면을 볼 수 없게 방해받지 않았으면 한다"는 굴드의 바람을 읽다 보면 참된 소통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