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6.23 23:31 | 수정 : 2008.06.24 04:17
'복길이 엄마' 탤런트 김혜정氏
미술은 나의 힘[1]
한 장의 그림이 마음을 달래고, 인생을 움직일 수 있다.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걸작'은 미술관에 걸린 대작일 수도 있고, 무명 작가의 작업실에 걸린 소품일 수도 있다. 본지는 창간 88주년 기념 《그림이 있는 집》 캠페인의 일환으로, 배우·시인·가수·출판인 등 문화계 인사들이 털어놓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TV 드라마 《전원일기》의 '복길이 엄마'로 유명한 탤런트 김혜정(47)씨는 방마다 그림이 있는 집에 산다. 식당 벽에는 푸른 바탕에 흰 꽃을 그린 그림, 거실 벽에는 푸른 연잎이 우거진 그림, 침실로 가는 복도 벽에는 조촐한 기와집 그림…. 김씨는 "지금까지 한 100점쯤 샀다"며 "어렵고 비싼 그림 말고, 내가 봐서 좋은 그림을 샀다"고 했다.
"데뷔 초기부터 촬영이 없는 날은 인사동에 갔어요. 전시회를 찾다 보면 '아!' 소리가 나는 그림이 있어요.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자연을 닮은 그림이 좋았어요. 그림이 맘에 들면 반드시 화가를 만났어요. 화가를 만나보고 그 사람도 좋아지면 그림을 샀지요."
1983년에 무명화가가 그린 초가 그림과 모과 그림을 각각 80만원, 100만원에 산 것이 첫 경험이었다. 그때 만난 화가는 라면 하나를 반으로 쪼개 점심과 저녁을 때우며 살고 있었다. 이 화가가 최근 김씨를 찾아왔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내 그림을 사줘서 고맙다"며 신작을 선물하고 갔다.
김씨는 4남매 중 셋째다. 몽상적인 심성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인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헌칠한 미남이었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일본인 회사에 10년쯤 근무한 것을 끝으로 다시는 취직하지 않고, 물려받은 땅을 팔아서 여행으로 소일했다. 땅은 줄고, 자식은 늘고, 집안은 기울었다.
10남매의 장남인 김씨의 아버지가 부친을 대신해서 동생들을 거두다가, 나이 마흔 안팎에 중풍으로 몸져 누웠다. 김씨 가족은 그가 열한 살 때 서울을 떠나 전북 완주에 내려갔고, 집안은 급속히 기울어갔다. 김씨는 "중학교 때 등록금을 못 낸 벌로 수업시간에 나 혼자 서 있곤 했다"며 웃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은행에 다니며 야간 대학을 마쳤고, 1981년에 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 붙었다. 1983년부터 2002년까지 꼭 20년간 '복길이 엄마'로 살았다.
장수 드라마에 고정 배역이라 평탄해 보여도 연기자로서 슬럼프도 있었고, 굴곡도 있었다. 그녀는 2003년 결혼 15년 만에 이혼을 했고, 2005년에는 집에서 요리를 하다가 온몸의 3분의 1에 3도 화상을 입기도 했다. 그런 굴곡이 있을 때마다 그림은 그에게 위안이 됐고, 그녀는 그림을 보면서 다시 일어났다.
김씨의 거실 한쪽에 중견 작가 윤장렬(55)씨의 유화가 걸려있다. 검은 물결에 흰 배가 둥실 떠가는 이 그림을 김씨는 1989년에 인사동의 한 전시회에서 샀다.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저 검은 물 속에 무한한 언어가 잠겨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맛있는 걸 사 들고 작가의 작업실에 찾아갔더니, 작가가 '물감 살 돈도 없어서 새우잡이 배를 탔을 때 그린 그림'이라며 '내 마음이 보이더냐?'고 신기해했어요."
김씨는 "살아있는 동안 맑은 생각,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싶고, 암울하고 처연한 것보다 '긍정'이 묻어나는 그림이 좋다"고 했다. "나를 위안하는 그림을 사 모았을 뿐, 돈으로 바꿔서 되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고도 했다.
"사람들이 '누구 그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소리가 참 듣기 싫어요. 정말 그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비싼 것을 소유할 안목과 재력이 있다'고 과시하는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