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리메이크인가

  • scene PLAYBILL editor 김아형

입력 : 2008.06.18 16:42

리메이크 열풍은 음반시장에만 불고 있는 게 아니다. 공연무대에서도 리메이크 물결이 넘실댄다. 뮤지컬 '헤드윅-프리스타일', '화성에서 꿈꾸다-이산의 꿈', '신(新) 행진! 와이키키', 연극 '닥터 이라부 에피소드 1' 등 제목에 변화를 준 경우부터 출연진이 바뀌거나 스토리를 다시 매만진 경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철 지난 공연들이 리메이크되고 있다.


안전한 선택으로 간다


영화나 음악은 시간이 지나도 얼마든지 다시 보고 듣는 게 가능한 반면 뮤지컬이나 연극은 공연기간이 끝나면 다시 보기가 불가능한 장르다. 한번 무대에 올려 인기를 얻었던 작품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의레 다시 관객몰이에 나선다.

특히 뮤지컬은 장기 공연을 할 만한 전용극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기를 얻은 작품들도 장소를 옮겨 가면서 공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각 제작사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자리를 굳힌 신시뮤지컬컴퍼니의 '맘마미아!', 오디뮤지컬컴퍼니의 '그리스'가 매번 공연장을 바꿔 가며 공연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지난달 5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샤롯데시어터에서 막을 내린 '맘마미아!'는 2004년 초연 이래 서울과 지방 공연장 등에서 재공연되며 70만 명의 관객을 유치한 바 있다. 뮤지컬은 제작비를 고려하면 장기 공연을 해야만 이익이 나는 수익구조를 갖고 있다. 때문에 공연기간을 늘리기 위해 장소를 바꿔 공연을 연장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또한 흥행 여부가 확실치 않은 새 작품보다는 이미 관객의 검증을 거친 작품을 좀 더 수정 보완하는 게 낫다는 시장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타 장르에 비해 비싼 티켓 가격 탓에 일반 관객들 역시 인지도가 높은 작품을 ‘검증된 작품’으로 인식해 선호하는 편. 연극 '라이어'나 '오아시스 세탁소습격사건' 등이 출연진에 상관없이 늘 만원사례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지난 공연을 통해 어느 정도 작품성과 흥행성을 검증받은 경우는 출연진이나 스태프가 바뀌어도 큰 문제만 없다면 일정 수익이 보장된다. 다시 공연을 할수록 제작비용은 내려가고 매출은 올라가기 마련이니 제작사 측에서는 재공연을 선호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경우의 재공연은 앙코르 공연 혹은 리바이벌 공연이라는 표현이 옳다. 하지만 근래에는 기존의 작품이 가진 틀은 그대로 두고 무대 기법이나 음악 등을 보완해 재공연하거나 제목부터 변화를 준 ‘리메이크 공연’이 증가하는 추세다.

개명(改名)과 원소스 멀티유스가 대세다

언제부터인가 대학로에서는 공연 제목에 ‘시즌’이란 타이틀을 겸한 작품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마치 '상상플러스 시즌 2 ', '위기의 주부들 시즌 4' 같은 버라이어티쇼나 시즌제 드라마를 연상케 하지만 공연계의 ‘시즌’이라 함은 ‘디벨롭(develop)’의 성격이 강하다.

드라마처럼 연속된 이야기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본 내용을 바탕으로 개보수 공사를 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6월부터 7개월간의 장기공연에 들어가는 뮤지컬 '헤드윅 시즌  4'의 부제는 ‘프리스타일’. 새로운 배우들이 합류할 때마다 앞번 공연과의 차별화를 강조해 온 이 작품은 여러 배우가 하루씩 번갈아 공연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한 배우가 3~6주 동안 원 캐스트로 무대에 서서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뿜어낸 후 다음 배우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형태로 공연된다.

그런가 하면 전편과 비교했을 때 캐스팅이 바뀌고 스토리가 보강된 것 외에는 큰 차이 없는 연극 '미스터 로비 시즌 2''와 공연시간 70분과 해피엔딩 연애 스토리라는 조건을 제외하고는 스토리와 연출가, 출연진 모두가 바뀐 연극 '70분간의 연애 시즌 2'는 ‘시즌제’ 공연의 대표적인 케이스.

이에 관계자는 “작용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기 때문에 ‘2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품이 ‘업그레이드’ 됐으니 ‘시즌 2’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미 검증된 작품이라도 똑같은 이름으로 장기 공연을 할 경우 관객들이 식상하다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시즌제’를 도입해서 제목에 변화를 주는 것도 마케팅 면에서 유리하다는 측면도 있다.

한편 원작자와의 마찰로 공연명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삼류밴드의 고단한 여정을 담은 임순례 감독의 영화를 바탕으로 2004년에 초연된 뮤지컬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6월 재공연을 앞두고 난항에 부딪혔다. 영화 저작권을 가진 MK픽처스로부터 ‘공연 불허’를 통보 받은 것.

처음엔 좋은 취지라고 판단해 무상으로 공연을 허락했던 영화사 측은 “그 후 더 이상의 상의 없이 재공연이 계속되자 신뢰가 깨져 이런 조취를 취했다”고 밝혔다. 이에 제작사 서울뮤지컬컴퍼니 측은 “실수는 인정하지만 공연하기로 한 뮤지컬은 포기할 수 없다”며 제목을 '신(新) 행진! 와이키키'로 바꾸고 극중 캐릭터의 이름과 영화와 흡사한 2막의 내용을 대폭 수정해서 작품을 올릴 예정이다.


위의 사례는 영화를 원작으로 한 ‘무비컬’이 대세인 뮤지컬 시장에 저작권과 관련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원소스 멀티유스’라는 리메이크 공연의 또 다른 형태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저작권 협상 단계에서 재창조에 관한 부분이 사전 논의가 되어야 하고, 리메이크의 개념 역시 세분화되어야 할 것이다.

‘원소스 멀티유스’는 비단 뮤지컬만의 얘기는 아니다. 연극 '닥터 이라부',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은 각각 소설과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는 창작의 소재가 다양하지 않은 국내 공연시장의 자구책인 동시에 이미 흥행 면에서 검증을 받아 위험성이 낮다는 장점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비스티보이즈' 역시 일찌감치 뮤지컬화가 결정된 것을 보면 지금의 ‘원소스 멀티유스’ 유행은 한동안 성행할 전망이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로 이미 기대치가 높아진 관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부담도 만만치 않을 터. 기본만 해도 흥행이 보장된다는 공식은 '댄서의 순정'이나 '대장금' 등의 부진을 통해 깨어진 지 오래다. 특히 뮤지컬의 경우는 적절한 음악 편곡과 무대에 어울리는 각색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올 하반기에 막이 오를 무비컬 '내 마음의 풍금'과 '미녀는 괴로워'가 풀어야 할 숙제도 여기에 있으니 새로운 소재 발굴이 절실한 시점이다.

웰메이드를 위한 리메이크

재공연이 성행하는 이유는 고정 레퍼토리를 만들어 안정된 수익을 얻고자 함이 가장 크지만, 그 이면에는 새로운 소재 부족이라는 당면 과제가 있다. 이를 두고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 전에 재공연의 결과물이 전보다 나아졌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해외에서의 재공연은 새로운 창작과정을 거친 리메이크 작품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뮤지컬 '시카고'는 1975년 초연 당시 흥행에 실패해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지만 20년이 지난 후 연출가 월터 바비와 안무가 앤 레인킹에 의해 현대적인 감각으로 탈바꿈해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섭렵하고 영화로도 리메이크되는 등 환골탈태의 성공사례를 제시했다.

어떤 형태로든 재공연이 될 때는 반드시 재창작도 뒤따라야 작품의 질적 향상은 물론 관객의 관심도 함께 끌어낼 수 있는 것. 기존 작품을 그대로 올리는 재공연이라면 이제 사양한다. 초연에 실패했다고 작품을 사장시키는 풍토도 이제 그만이다. ‘웰메이드를 위한 리메이크’라는 과정을 통해 새 날개를 달고 무대에 오르는 재공연작들이 어느 때보다 기다려진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