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모네 그림 속 배가 움직인다

  • 신정선 기자

입력 : 2008.06.13 15:11 | 수정 : 2008.06.14 13:53

명화를 '움직이는 그림'으로 재창조 미디어 아트 작가 이이남

미디어 아트 작가 이이남씨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인터컨티 넨탈 호텔에 걸린‘신(新)금강전도’옆에 섰다. 작품은 비가내리고 눈이 오는 금강산의 사계절을 꿈결처럼 보여준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인왕산 기와집에 불이 켜진다(신인왕제색도). 잠자리가 날고 벌레가 기어간다(신초충도). 사공은 강을 따라 배를 저어간다(신해돋이)….

미디어 아트 작가 이이남(39)의 손끝에서 겸재 정선과 신사임당, 모네의 그림이 다시 태어났다. LCD 모니터를 통해 명화를 '움직이는 그림'으로 재창조하는 이씨의 작품을 올 1월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미(美)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평했다. 그때 웹사이트 동영상에 소개된 게 그의 '신(新)묵죽도'다.

고흐와 르누아르 같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 움직이는 모 대기업의 가전제품 광고도 이씨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이다. 지난달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국제아트페어(CIGE)에는 이씨의 작품을 그대로 베낀 '짝퉁'까지 등장했다.

"중국 작품은 화질이 형편없고 작품 수준도 떨어졌지만 오히려 제 작품보다 비싸게 팔렸어요. 중국인들이 자국 작품에 대한 애착이 강한 데다, 지갑이 두둑해 구매력이 막강하거든요. 짝퉁이 더 나오지 못하게 국제 특허를 신청할까 생각 중입니다."

지난달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6600만원에 낙찰된 꿈33. 왼쪽 모네 그림에서 나온 배가 가운데 산수화를 지나 오른쪽 모네 그림까지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지난 3일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만난 이씨는 "왜 움직이는 그림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차가운 기계가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에 따뜻한 감성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호텔 2층에는 이씨의 작품 '신(新)금강전도'가 걸려 있다. 40인치 모니터 속, 금강산 봉우리에는 자유의 여신상과 쌍둥이빌딩이 서서히 솟아났다. 꼭대기에는 타지마할. 계절이 바뀌면서 비가 내리고 눈이 날린다. 시공간을 초월한 영상 작품은 7분간 이어진다.

원래 이씨는 조선대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움직이는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98년. 대학에서 미술론을 가르치다 애니메이션 기법에 눈을 뜨게 됐다.

"정지한 조각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을 발견했어요. 제가 원래는 기계치(機械痴)예요. 컴퓨터도 제대로 다룰 줄 몰랐어요. 기초부터 일일이 물어가면서 배웠습니다. 고장 난 모니터를 못 고쳐서 밤새 끙끙댄 적도 많아요."

캔버스 격인 모니터를 살 돈이 모자라 쩔쩔매기도 했다. 아이디어를 제대로 구현할 만한 모니터는 한 대에 400만원을 훌쩍 넘었다. 부족한 비용을 장인에게 '대출' 받아 메우기도 했다.

이씨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06년 광주비엔날레 때 '8폭 병풍'이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8개 모니터를 가로지르며 나비가 나는 모습에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감탄했다고 한다. 이씨는 "김 전 대통령이 한참 발길을 멈추고 보다가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느냐'고 물었다"고 전했다. 이씨의 '병풍'은 1억원을 호가한다.

지난달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40인치 모니터 3개를 연결한 '꿈3'이 6600만원에 낙찰됐다. 모네의 그림에서 나온 배가 남농(南農) 허건(許楗)의 산수화로 들어갔다가 오른쪽의 다른 모네 그림으로 옮겨간다.

저작권 문제는 없을까. "패러디 등 2차 가공물은 저작권에 제한 받지 않는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새로운 해석이 가미돼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씨의 작품이 알려질수록 아이디어와 기술을 도용하려는 곳도 늘고 있다. 공동작업을 할 것처럼 접근했던 한 대학 연구소는 제작 방법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는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알고 보니 연구소에서는 이씨 몰래 '짝퉁'을 만들고 있었다.

비디오 아트의 대가 백남준을 존경하는 이씨는 앞으로 모니터 대신 세탁기 유리창을 이용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세탁기에서 물이 나오면 유리창의 그림이 '세탁'되면서 풍경과 인물이 변하게 된다. "오래전 양은 도시락과 교실 난로도 화면에서 되살려보고 싶습니다. 관람객들이 제 작품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