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서예에 디자인을 입히니… 글씨 값이 수백만원?

  • 염강수 기자

입력 : 2008.05.30 13:49 | 수정 : 2008.05.31 06:37

캘리그래피<calligraphy>가 뭐기에

대구대 시각 디자인과 박병철 교수 / 캘리그래피‘심화(心畵)’이상현 대표

올 2월 10일 방화(放火)로 붕괴된 서울 남대문 복원공사 현장. 최근 이곳 공사장 가림막에 힘찬 붓글씨가 걸렸다. '아름답고 늠름한 모습 그대로…'라는 글귀다. 이 글씨는 남대문에 예전 모습을 되찾기를 기원하는 시민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혹시 이 글씨가 마음에 들어 글씨를 쓴 사람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면? 멀리 갈 것 없다. 인근 수퍼마켓에 들르면 된다. 아니 이미 그의 작품을 집 안 냉장고나 서가에 한두 개쯤 소장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남대문 가림막 글씨를 쓴 주인공은 캘리그래피(calligraphy) 전문업체인 '술통' 강병인(47) 대표. 캘리그래피는 우리말로 손 글씨라는 뜻이다. 강 대표는 각종 상품의 포장지나 영화 타이틀, 책 표지에 글씨를 쓴다. 캘리그래피는 글자 자체의 예술성보다 한 제품이나 사진 등에 들어갔을 때의 디자인 요소를 더 강조하는 점에서 서예와는 다르다. 직업 특성상 강 대표는 주류를 비롯해 비누, 세제, 라면 등 수퍼마켓에서 파는 생필품 겉표지에 글을 쓴다.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일상생활에서 글쓰기가 거의 사라진 시대에 '글씨'를 팔아 돈을 버는 직업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음료·주류 업체는 물론 드라마 제작사, 영화사, 출판사들은 캘리그래퍼의 '글씨'를 받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10년 전만 해도 '밥이나 한 끼 사주면' 그만이었던 글씨 값이 작품당 가격이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캘리그래피 학원에는 수강생들이 꽉 들어찬다. 올 3월에는 캘리그래피 전문가들이 모여 '한국 캘리그라피 디자인협회'라는 단체까지 만들어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오직 한 제품만을 위해 존재하는 글씨

26일서울 마포구 동교동 캘리그래피 전문회사 '필묵' 사무실. 필묵은 1999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캘리그래피 전업(專業)을 선언하고 나선 회사다. 사무실 입구에는 '복수는 나의 것' '챔피언'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등 영화 타이틀이 전시돼 있다. '사표는 전략이다' '소현제자' 등 책 표지는 물론이고 '2080 동의생금'과 같은 치약, '건면세대'와 같은 라면, '황금 참기름' 등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캘리그래피 전문회사‘필묵’의 김종건 대표.
필묵 김종건(37) 대표는 "99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디자인 시장에 글씨를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며 "여기 전시된 작품들은 어려웠던 초기에 시장을 개척했던 효자 작품"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기 이전 과자류나 식음료, 주류 등 제품의 로고는 캘리그래퍼의 도움 없이 디자이너들이 컴퓨터에 있는 폰트를 이용해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캘리그래퍼들의 주 활동영역이 된 영화 제목이나 책 표지 시장도 당시에는 마찬가지였다.

캘리그래피 전문회사 '심화'의 이상현(35) 대표는 "1999~2000년 시기에 처음 시장 진출을 노린 분야는 출판이었다"면서 "책 표지는 손 글씨가 가진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글씨를 맡겨달라고 출판사를 돌아다녔지만 받아주는 출판사는 없었다. 굳이 서예 글씨가 왜 필요하며 대서소 가면 몇만 원이면 글씨를 받을 수 있는데 왜 '캘리그래퍼'에게서 비싼 돈을 주고 사냐는 반응만 돌아왔다고 한다.

2000년 들어 시작된 한국 영화 붐과 함께 캘리그래퍼들에게도 기회가 왔다. 자금과 관객이 몰리자 영화업계에서 영화 포스터의 새로운 얼굴로 캘리그래피를 속속 도입한 것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년)' '복수는 나의 것(2002년)' 등 영화 제목 글자를 보는 순간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독특한 영화 제목은 영화의 성공과 함께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be the reds'라는 캘리그래피가 들어간 붉은색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도 '손으로 쓴 글씨'가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한 계기가 됐다.

장대식 '글씨디자인 어필' 대표는 "지금 산업적으로 사용되는 컴퓨터 폰트는 2000종류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지만 폰트라는 특성상 기계적이고 딱딱하다는 느낌이 날 수밖에 없다"며 "한 회사 제품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느낌을 소비자들에게 감성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으로 캘리그래피가 채택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담배회사 KT&G는 2500원짜리가 최고가인 국내 담배 시장에 지난해 4000원짜리 '에세 골든 리프'를 출시하면서 김소월 시인의 '님과 벗'이라는 캘리그래피를 담뱃갑에 새겼다. KT&G 브랜드실 이왕섭 과장은 "디자인에 통상 사용되는 글씨체를 사용하면 일반 담배와 다른 '프리미엄'이라는 느낌을 전달할 수 없다"면서 "의상 디자인에 한글 캘리그래피를 적용한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씨에게 글씨와 디자인을 맡김으로써 '4000원'을 내고 살 만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캘리그래피 전문회사‘술통’강병인 대표는“좋은 글꼴은 소비자와의 소통을 돕는다”고 말했다. 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캘리그래피 수요가 급증하자 전문업체들이 속속 생겼다.

1999년 '필묵'에 이어 2002년에는 '술통'과 '캘리디자인(대표 이규복), 2003년에는 '심화' 등 '캘리그래피'만 전업으로 하는 업체들이 잇따라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는 약 10개의 캘리그래피 전문회사가 활동 중이고, 프리랜서 등을 포함해 약 30여 명의 캘리그래퍼가 활동 중인 것으로 캘리그래퍼협회 측은 추산했다. 물론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면서 캘리그래피도 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난다.

◆손 글씨, 가난한 예술에서 돈 되는 산업으로

'필묵' 김종건 대표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서예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글씨 잘 쓴다'는 칭찬을 받으며 그는 원광대 서예학과에 입학했고, 군대에 가 '필사병'으로 이름을 날렸다. 부대의 각종 시상에 사용할 상장을 썼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사단장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도 썼다. 손가락이 부르터라 연하장 1000장을 쓴 후 특별휴가를 받는 등 그의 붓글씨 솜씨는 사격이나 축구를 잘하는 것 이상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복학 후 대학 졸업을 앞두자 상황은 달라졌다. 좋아서 시작한 서예였지만 먹과 붓이 빵을 구워줄 가능성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두고 우선 돈을 벌기 위해 서예 전문 잡지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이어 컴퓨터에 쓰이는 글꼴을 만드는 폰트회사에 취직했다.

어느 날 야근을 하다 일본 서예 사이트인 '쇼도(書道)'를 방문하게 됐다. '쇼도'에서 본 붓글씨는 화선지에 써서 액자로 포장해 집안 거실이나 사무실에 걸어두는 용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 대표는 "서예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고 했다. 바로 서예에 디자인을 입히는 것이었다. 그는 디자인 대학원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고 1999년 11월 '필묵'을 열었다. 한국 최초의 캘리그래피 전문업체였다.

캘리그래피 회사 '심화' 이상현 대표도 서예학과 출신이다. '서예 대가'를 꿈꾸며 대학에 들어갔지만 이미 서예는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1999년에는 국정 미술 교과서 뒤쪽에 그나마 겨우 몇 페이지 남아있어 명맥을 유지하던 서예 부문이 교과서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국정교과서 6개 가운데 4개에서 서예가 아예 빠져버린 것이다.

이 대표는 '서예'가 다시 교과서에 실리게 하기 위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일반인들의 무관심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대표는 "그 무렵 서예의 대가가 된다는 꿈을 접고 우리 서예 대중화에 앞장서는 서예계의 홍보부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면서 "대중화의 수단이 바로 서예와 디자인을 결합한 캘리그래피였다"고 말했다.

'술통' 강병인 대표는 붓글씨에 빠져 중학교 때 영원히 묵만 갈겠다는 뜻으로 '영묵'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러나 디자인 회사에 취직해서 10년 이상 세월을 보낸 후 2002년 '술통'을 차려 비로소 글씨 쓰는 일을 전업으로 할 수 있게 됐다.

◆글자당 가격은 얼마?

캘리그래퍼들이 한 번에 쓰는 글자 수는 대부분 10자 미만이다.

책 표지, '참이슬'과 같은 상품 로고, 영화 제목, 드라마 제목 등 분야에 따라 가격대가 있을까? 캘리그래퍼들은 대부분 "영업 비밀"이라며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 않았다.

'필묵' 김종건 대표는 "책 표지 디자인의 경우 적게는 50만원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상품 로고를 쓰는 것은 300만~500만원, 영화 포스터의 경우는 200만~300만원 정도이지만 다루는 종류가 '글씨'여서 실제 계약할 때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라고 말했다.

필묵에서 2002년 SK텔레콤 의뢰로 만든 광고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글씨의 경우 1000만원 이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하게 단가를 정해 글자를 한 자씩 판매하는 전문업체도 있다.

'캘리디자인' 이규복 대표는 2003년부터 한글, 한자, 일본어, 영어 등 분야별로 나눠 글자당 2000~4000원을 받고 판매한다. 아라비아 숫자는 2000원이고 한글과 한문은 4000원이다. 이 대표 자신이 직접 쓴 글씨체로, 모두 1만2000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 대표는 "주요 고객은 자신이 맡은 상품에 캘리그래피를 넣으려고 하는 디자이너들"이라며 "자동차를 장식하거나 자신의 이름을 쓰기 위해 주문하는 일반 고객도 가끔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이트에 올린 1만2000자는 일종의 공산품이기 때문에 글자당 가격을 정해 팔지만 구체적으로 한 기업, 한 상품에서만 사용하는 캘리그래피 가격은 공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캘리그래피 글자당 최고 단가는 얼마일까?

영화 '축제'로 알려졌다. 개봉 당시 영화사 측에서 영화 포스터를 만들면서 여태명 원광대 서예학과 교수의 작품집에서 허락 없이 '축' 자와 '제' 자를 따로 떼어내 영화 타이틀로 사용했다가 분쟁이 발생했다. 결국 영화사 측은 여 교수에게 글씨체 사용료로 2000만원을 지급했다. 글자당 1000만원인 셈이다.

박병철 대구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폰트가 아닌 전문 캘리그래퍼가 쓴 글씨가 많이 쓰이면서 글씨체 도용에 따른 분쟁이 가끔 생긴다"면서 "캘리그래피는 누가 쓴 것이라는 라벨이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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