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강력한 자제력이 빚어낸 최고의 '비창'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6.01 23:35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은 올 들어서만 내한 공연 때 3차례나 울려 퍼진 '단골 레퍼토리'다.

지난 3월 런던 필하모닉을 필두로 BBC 필하모닉과 지난 30·31일 내한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지휘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까지 모두 같은 곡을 서울에서 연주했다.

하지만 이 교향곡은 연주 도중 나오는 중간 박수로 인해 '사고다발 교향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BBC 필하모닉 내한 공연 때는 철저한 장내 방송 덕에 다행히 사고를 면했지만, 런던 필하모닉 공연 당시에도 3악장이 끝난 뒤 4악장이 채 시작하기도 전에 악장간 박수가 터졌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니다. 명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비창 3악장이 끝난 뒤 박수가 나오는 건 물론이고, 때로는 4악장이 존재하는 걸 모른다는 듯이 청중들이 나가버리곤 한다"고 불평했다. 기쁨에서 슬픔으로, 빛에서 어두움으로, 환희에서 비탄으로, 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며 표정이 바뀌기에 〈비창〉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걸 감안하면 무척 아이로니컬하기도 하다.

지난 3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도 어김없이 3악장이 끝난 뒤 악장간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에센바흐는 그 싹을 잘라버리려는 듯, 짧은 휴지기도 없이 곧바로 4악장으로 넘어갔다.

'필라델피아 사운드'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풍성한 현악의 울림에, 비탄을 표현하기 위해 음표만이 아니라 쉼표까지 총동원한 에센바흐의 명민한 해석이 겹치면서 가슴에 맺혀 있던 멍울이 끝내 터지고 말았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운데)가 연주를 마친 뒤, 관객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근래 연주된 〈비창〉 가운데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 것은, 4악장 이전까지 강력한 자제력을 견지한 덕분이기도 했다. 도입부부터 달아오르기 쉬운 3악장에서도 에센바흐는 타악을 신호로 오케스트라 총주(總奏)가 시작되는 중반부까지 최대한 절정을 뒤로 늦춰놓았다. 한껏 억제돼 있던 오케스트라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자 표현력은 극대화됐다.

이튿날인 31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에서도 에센바흐는 비슷한 전략을 구사했지만 오히려 다른 결과가 나왔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지휘자는 3악장에서 다시 한 번 박자를 최대한 늦춰놓았다가 4악장에서 제자리로 되돌려놓으며 웅혼한 결론을 맺고 싶어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느린 템포에 긴장감이 일찌감치 풀린 감이 없지 않았다. 악센트와 완급, 강약의 디테일까지 치밀하게 조절하는 에센바흐 특유의 해석이 그대로 드러난 이틀이었다.

31일 1부에서는 이 교향악단의 부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엣 강과 비올라 수석인 장중진 등 한국계 단원들이 협연자로 나와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연주했다.

지휘자 이전에 피아니스트로 이름 높은 에센바흐는 단원들과 항시 실내악을 연주하면서 '집안 앙상블'을 살리는 것으로도 이름 높다. 협연자들이 고고한 독주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와 함께 자연스러운 합주로 곡을 시작한다는 점에서도 협주곡이 아니라 실내악을 듣는 듯한 재미가 쏠쏠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음악 감독에서 물러나는 에센바흐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마지막 호흡을 느껴볼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