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정민 교수의 '그림 읽기 문화 읽기'] 신명연 애춘화첩 중 '여치와 하늘소'

  •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입력 : 2008.05.23 13:54 | 수정 : 2008.05.24 18:48

갑옷 입은 벌레 하늘소 과거 급제하라는 축원
여치 울음소리·베 짜는 소리 비슷
"아내는 베를 짜 집안을 일으켜라"

바위 위엔 알락 하늘소가 버텨 서서 아래쪽을 굽어보고, 땅 위에선 여치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위쪽을 올려다본다. 둘의 더듬이 방향이 서로를 향했다. 바위 아래에는 뱀딸기 덤불이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땅 위로 뻗어간다. 6월에 익는 뱀딸기와 9월에 나오는 여치를 함께 그렸으니 이치로 읽어야 한다.
비단에 채색. 세로 27.3×가로 15.0㎝, 개인 소장
하늘소의 한자 이름은 천우(天牛)다. 말 그대로 하늘 밭을 가는 소다. 하늘소는 흑갑충(黑甲蟲), 즉 검은 갑옷을 입은 벌레다. 갑충은 늘 과거에 1등으로 급제하라는 축원과 맞물린다. 더듬이는 대나무 줄기 그리는 법으로 그렸다. 씩씩한 남정네의 기상이다. 등에 박힌 별점은 문장(文章)을 뜻한다. 과거에 급제해서 하늘 밭을 가는 소가 되라 했으니 그가 갈 밭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경세(經世)의 밭이다.

여치는 한자로는 촉직(促織)이다. 찌익 짝 찌익 짝 하고 우는 여치의 울음소리는 베틀에서 실꾸리 감은 북을 좌우로 던질 때 나는 소리 비슷하다. 어서 베를 짜라고 재촉하는 듯이 들린다. 여치가 울면 추수도 끝나고 베 짜는 시절이 돌아오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말 이름도 베짱이다. 이솝 우화 속의 베짱이는 노래나 부르며 빈둥빈둥 놀다 대책 없이 겨울을 만나는 한량으로 나온다. 우리 문화 속의 베짱이는 가족들이 입을 옷감을 부지런히 짜는 어진 아내의 의미다.

뱀딸기는 앞서 신사임당의 그림에서도 보았다. 주렁주렁 덩굴져 열매가 달리는 것은 모두 자식 많이 낳으란 이야기다. 벌써 여러 번 나왔다. 하늘소는 듬직한 남편, 베짱이는 현숙한 아내다. 뱀딸기는 주렁주렁 많은 자식이다. 결혼 축하 선물로 그려준 그림이다. 현제명 선생이 작사 작곡한 가곡 〈오라〉 중의 "목동은 밭 갈고 처녀는 베 짜서 기쁘게 살도록 오라 오라"는 대목을 연상시킨다.

합쳐 읽는다. "남편은 과거에 급제해서 나라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하늘소), 아내는 열심히 베를 짜서 집안을 일으키며(베짱이), 귀한 자식 많이 낳아(산딸기) 다복한 가정을 꾸려가기 바란다."
그림을 그린 신명연(申命衍, 1808~?)은 자하 신위의 아들로, 화훼에 특히 솜씨가 뛰어났다. 낙관에 찍힌 '애춘(靄春)'이 그의 호다. 화제로 쓴 시는 이렇다. "비오는 밤 서리 새벽 종소리 재촉 마오./ 갈바람 옥이슬에 우는 벌레 또 있나니./ 늙은 나는 올 들어 아무런 느낌 없어/ 애면글면 제먼저 겨울 잠에 드는도다.(莫催雨夜霜晨鍾, 亦有金風玉露�. 老我年來無感性, 枉渠先自蟄成冬)" 화제는 그림의 주제를 설명하지 않았다. 노경에 접어드는 비 오는 가을밤에 이 그림을 그렸던 모양이다. 하늘소와 베짱이의 은근한 배치에서 푸근한 정이 우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