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젊은 슈베르트의 마법 푼 피아노의 노장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4.30 23:33

올해 말 은퇴 의사를 밝힌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Brendel)은 자타가 공인하는 고전 스페셜리스트입니다. 77세 평생에 걸쳐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건반 음악을 연주하고 또 연구해왔지요. 스스로도 "고전은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만큼 의미가 크다. 시간이야말로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말합니다.

그런 그가 직접 해설하고 연주했던 슈베르트 피아노 작품 영상물이 5장의 두툼한 DVD(이클라세)로 최근 국내 소개됐습니다.

첫 곡 〈방랑자 판타지〉를 해설하면서 그는 "슈베르트는 31세의 나이로 죽었다"며 말문을 엽니다. "그 동안 그의 기악곡이 지닌 중요성을 몰랐거나, 의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을 제외하면 그토록 젊은 나이에 주요 작품을 남긴 작곡가는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이 일러주듯,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에 대한 조명은 주로 성악 분야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피아노 곡에서도 베토벤에 비해 별로 진전한 것이 없다는 주장이 있었지요.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명 피아니스 트 알프레드 브렌델. /이클라세 제공

하지만 브렌델은 "피아노를 오케스트라처럼 사용한 대목들을 들어보라. 현악 트레몰로가 점차 증가하면서 서서히 관악기가 들려오기 시작한다"면서 직접 연주를 들려줍니다. 영상 내내 브렌델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음악이 지니고 있는 관현악적 면모를 강조합니다. 그의 손가락에 따라서 88개의 건반은 88개의 악기로 변신합니다.

해설을 할 때는 마치 〈경찰청 사람들〉에 등장하는 형사처럼 써놓은 원고를 직접 넘겨가며 읽는 모습이 다소 어눌해 보입니다. 하지만 손가락 보호를 위해 밴드로 감싼 손끝을 건반으로 가져가면 어김 없이 피아노의 사색가로 변모합니다.

브렌델은 이 영상에서 슈베르트에 대한 선입견을 조목조목 따집니다. 흔히 슈베르트는 감성적인 작곡가라는 단정에 대해 그는 "모든 위대한 작곡가를 특정 용어로 단정 짓는 건 불가능하다"고 맞서고, "베토벤이 본질적으로 건축가처럼 작곡했다면 슈베르트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작품에 즉흥성을 강조했다"고 비교합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곡에 숨어있는 '순간의 마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전공생에게는 당대의 슈베르트 거장이 들려주는 영상 강의요, 애호가들에게는 슈베르티안(Schubertian)의 생생한 자기 고백으로 다가옵니다. 올해가 지나면 더 이상 브렌델의 연주를 볼 수 없다는 섭섭함을 뒤늦게나마 풀어주는 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