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붓끝에 기러기들도 모여 앉더라

  • 김수혜 기자

입력 : 2008.04.28 23:34

'조선 서화 보묵'展 개막… 우리 옛 그림 70여 점 망라

비단 병풍에 담긴 기러기 예순 마리가 금방이라도 먹빛 깃을 치며 병풍 밖으로 튀어나올 듯 하다. 최초로 일반에 공개된 조선 화가 장승업(張承業·1843~1897)의 걸작 〈노안도(蘆雁圖) 십폭병(十幅屛)〉이다. 장승업은 기러기 떼를 세세하게 스케치해서 오밀조밀 그리지 않았다.

기량이 절정에 오른 만 43세에 큰 붓에 먹과 도료를 찍어 종이 위에 일필휘지 휘둘렀다. 붓질 한번 할 때마다 기러기 한 마리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고, 강물을 향해 곤두박질하면서 종이 위에 살아났다. 이 병풍은 장지에 그린 그림은 물론, 그림을 받친 누런 비단과 푸른 비단, 단정하게 짜맞춘 오동나무 틀과 정교한 놋쇠 못까지 보존 상태가 완벽에 가깝다.

29일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조선서화 보묵(寶墨)전》이 개막한다. 보석 같은 우리 옛 그림 70여 점을 망라한 전시다. 퇴계 이황이 스승 이언적의 시를 초서로 베껴 쓴 〈유거(幽居·그윽한 거처)〉, 정조가 체재공에게 쓴 것으로 추정되는 어찰 〈근후안승(近候晏勝·요즘 안녕하신지요)〉, 양사언이 '미친 초서'(狂草)로 휘갈겨 쓴 시 〈학성기우인(鶴城寄友人·학성에서 벗에게 줌)〉 등이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된다. 안평대군이 서른두 살 되던 해 감지(甘紙)에 금물로 베껴 쓴 〈지장보살본원경〉도 단아하기 그지 없다.
기러기 60마리가 혹은 호방하게 날아오르고 혹은 한가롭게 물가를 노니는 장면을 화폭 하나에 담아낸 장승업의〈노안도 십폭병〉. 종이에 담채. 144×41.3cm×10폭. 1886년작./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이번 전시는 사업가이자 개인 컬렉터인 김명성씨의 소장품 500여 점 중 핵심을 추린 것이다. 김씨가 모은 그림과 글씨는 〈아라재(亞羅齋) 컬렉션〉이라고도 불린다. 아라재는 김씨가 서울 안국동에 세운 개인 장서각 당호다. 김씨는 지난해 타계한 청관재 조재진씨와 함께 동시대의 대표적인 고미술 컬렉터로 꼽힌다.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연구사는 "미공개작은 물론, 일제시대와 1960~70년대 흑백도록에 실린 것을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서 자취를 감춘 희귀작이 여러 점 포함돼 있다"고 했다. 다음달 25일까지. (02)580-12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