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도 음악도 끊어질듯 흐느꼈네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8.04.16 23:30 | 수정 : 2008.04.17 07:59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러시아 거장 유리 그리가로비치 안무로 초연
섬세한 연출·구성 비해 허술한 세트 아쉬워

무대는 칼춤으로 열린다. 원수지간인 두 가문 사내들은 칼을 겨눈 채 상대의 몸 깊숙이 시선을 꽂아 넣고 있다. 비극을 예고하는 춤이다. 푸른 혈관을 따라 흐르는 붉은 피처럼, 로미오의 의상은 푸르고 줄리엣은 더없이 붉다. 줄리엣 집안의 무도회에 로미오 일행이 가면을 쓰고 들어가면서 이 걷잡을 수 없는 사랑과 죽음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국립발레단이 16일 러시아 거장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초연했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은 처음엔 느슨해 보였지만 그 느림은 곧 휘몰아칠 비극에 속도감을 더하는 전략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나는 장면은 음악과 춤이 뚝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 대목에서 상대에 대한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표현하며 천천히 원을 그린다. 심리를 시각화하는 동그라미다. 둘의 느린 파드되(2인무)는 격정을 안으로 쌓는 운치가 있었다.

발코니 장면은 세트가 아쉬웠다. 아름다운 파드되와 숭고한 음악에 비해 허술해 보였다. 구성은 긴장·이완의 리듬감이 좋았다. 티볼트의 남성적인 춤과 머큐쇼의 희극적인 춤이 충돌한 뒤 여인들의 검은 군무가 들어왔고, 곧장 로미오와 줄리엣의 침실 장면을 이어 붙였다. 티볼트와 머큐쇼가 죽을 땐 음악도 몸짓도 뚝뚝 끊어지며 흐느꼈다.
《로미오와 줄리엣》중 1막 발코니 장면에서 2인무를 추는 김주원(오른쪽)과 김현웅. 안무가 그리가로비치는《백조의 호수》《호두까기 인형》《스파르타쿠스》등 국립발레단 주요 레퍼토리를 안무했다. /국립발레단 제공
2막은 더 드라마틱했다. 시체처럼 잠드는 약을 마신 줄리엣은 꿈속에서 로미오를 만나고 티볼트와 머큐쇼의 망령이 등장한다. 또 푸른 달빛 아래 춤추는 《지젤》의 윌리(처녀귀신) 같은 여인들을 비롯해 기괴한 인물들이 지나간다. 셰익스피어 원작에는 없었던 줄리엣의 내면 풍경이다. 이 발레는 종종 시간을 늘어뜨리며 그런 심리 상태를 무대에 구체화했다.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로미오가 무너질 때, 그 격렬하고 무질서한 감정도 춤이 됐다.

이번 국립발레단 공연에는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이 초청돼 김주원과 함께 줄리엣으로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러시아 유학파로 상체 움직임이 좋은 두 발레리나가 100분 동안 사랑·이별·죽음을 가로지르는 진폭 큰 배역을 어떻게 견디고 넘어서는지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개막을 하루 앞두고 손가락을 다친 김현웅은 부상 투혼을 보여줬다.

17·19일은 김지영·정주영, 18일엔 김주원·김현웅이 줄리엣·로미오 역을 맡는다.

▶1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587-6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