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세기의 소프라노가 '광란의 장면'에서 누운 까닭은?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4.16 23:34

벨리니의 오페라《청교도》에 출연한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제공
'21세기의 칼라스'는 무대 위에 드러눕습니다. 지난해 1월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메트).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에서 엘비라 역을 맡은 러시아 출신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Netrebko)는 2막 〈광란의 장면〉을 부르던 중에 무대에 누워 검은 머리카락을 오케스트라 피트(pit·席)로 한껏 늘어뜨립니다.

결혼 직전 연인이 자신을 버린 것으로 여기고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탄식하며 서서히 착란에 빠져드는 〈광란의 장면〉은 소프라노들이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모두 쏟아 부어야 하기에 항상 두려움과 경외를 안기는 대목입니다.

면사포를 둘러쓴 채 무대 뒤편에서 서서히 계단을 내려오는 네트렙코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부른 뒤 사라져버렸다"며 노래를 시작합니다. 서정적이기 그지없으면서도 애끊는 이 장면에서 네트렙코는 면사포를 스스로 들추더니, 무대 앞쪽으로 걸어와 돌아누워서도 계속 고난도 아리아를 소화합니다. 우리 시대의 칼라스는 오디오의 듣는 감동만이 아니라 비디오의 보는 재미까지 함께 선사합니다.
최근 국내에 소개된 이 공연 실황(DVD·유니버설 뮤직)은 오페라 영상도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무대 정면만 비추던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등장 인물의 출입과 무대 장치 전환은 물론, 중간 휴식 시간에는 또 다른 명 소프라노인 르네 플레밍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네트렙코를 인터뷰하기도 합니다.

공연 중에는 가수를 건드려서도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뒤흔든 것입니다. 네트렙코는 대기실 인터뷰에서 "위대한 소프라노들로부터 (연기와 노래를) 조금씩 훔쳐 쓰고 있다"며 까르르 웃습니다.

달라진 건 화려한 카메라의 움직임만이 아닙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페라 실황은 '공연→녹화→영상물 출시'라는 단선적 과정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즌 메트에 취임한 피터 겔브(Gelb) 총감독은 마치 스포츠 경기처럼 오페라를 영화 극장에서 생중계로 방영한 뒤, 나중에 다시 DVD로 내놓는 다매체 전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이기 그지없던 오페라가 극장 문턱을 낮추고, 위성 중계부터 라디오 방송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 사례가 바로 이 《청교도》실황입니다.

올해 초 네트렙코는 임신으로 여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부터 당분간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극장과 음반사는 당분간 프리마돈나를 잃는 아쉬움을 달래야 하겠지만, 성악가로서의 행복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행복도 중요하겠지요. 이 실황은 '아기 엄마'가 돼 돌아오기 전까지 네트렙코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영상 가운데 하나이기에 즐거움과 아쉬움이 동시에 교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