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이념을 넘어… 그리고 기숙사 창문을 넘어온 사랑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4.08 22:26

16일 서울시향 연주회 지휘봉 잡는
이고르 그루프먼 순애보

선율을 타고 국경과 이념의 장벽을 넘은 사랑이 여기 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이고르 그루프먼(Igor Gruppman·52)이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간 건 15세 때인 1971년이었다. 여기서 그는 구(舊) 유고 출신의 동갑내기 바이올린 전공생 베스나(Vesna)를 처음 만났다. 처음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레오니드 코간 같은 명(名) 스승에게서 사사하며 경쟁하는 라이벌이었지만 둘은 곧장 사랑에 빠졌다. 이고르는 8일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 음악원에서는 경쟁이 치열했지만, 라이벌 의식은 사랑으로 곧잘 바뀌곤 했다"며 웃었다.

1979년 이고르의 가족이 소련 당국에 냈던 해외 이민 신청이 1년 6개월여 만에 받아들여졌다. 엄혹한 냉전 시기에 이민 신청은 곧장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의 가족이 주변을 정리하고 기차를 탈 때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24시간뿐이었다. 그는 "이민 신청자 가운데 20% 정도에게만 허가가 떨어졌다. 가족들은 언제 떠날지 몰라 항상 짐을 싸고 대기했다"고 말했다.
이고르 그루프먼과 베스나 그루프먼은 동료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동료 교수, 40여 년째 함께 살고 있는 부부이기도 하다. /서울시향 제공
23세의 청년 이고르는 여자 친구의 기숙사로 달려가 작별을 고했다. "수위 몰래, 친구의 3층 기숙사 방에서 부엌 창문을 통해 326호로 건너갔다"며 방 번호까지 정확하게 기억했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그때 우리는 너무나 젊었다"며 즐겁게 회상했다.

그 뒤 이고르의 가족은 오스트리아이탈리아를 거쳐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 이주했다. 정확히 10개월 뒤 여자 친구 베스나가 유고의 '관광 비자'로 미국에 건너왔고 둘은 결혼했다.

지금 이 부부는 로테르담 음악원에 4년째 함께 재직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두 부부는 말컴 아놀드의 〈두 대의 바이올린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함께 녹음했고, 이 음반은 1994년 그래미상 프로듀서상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남편 이고르 그루프먼이 1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서울시향 연주회에서 지휘봉을 잡기 위해 내한한다.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악장이기도 한 그는 오는 6월 이 악단 내한 공연 때는 악장으로 다시 온다. 이고르는 런던 심포니와 로열 필하모닉의 객원 악장을 지낸 오케스트라 연주자이며, 동시에 아내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실내악 연주자,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는 지휘자, 로테르담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수까지 '1인 4역'을 맡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나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지만, 각각의 역할은 내게 성장할 기회를 주기 때문에 모두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났던 스승 야사 하이페츠의 가르침을 전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일지라도 영적이고 감성적인 내용과 에너지가 담기기 전까지는 텅 빈 그릇일 뿐이다." 지금도 이 말을 제자들에게 항상 전해준다고 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협연 미하일 시모냔)과 〈교향곡 5번〉 등을 들려준다.

▶서울시향 연주회, 16일 오후 7시30분 세종문화회관, (02)3700-6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