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영화 속 그림이 말을 거네

  • 한창호

입력 : 2008.03.28 15:06 | 수정 : 2008.03.29 09:59

캐릭터 설명, 주인공의 운명 암시 등에 다양하게 사용

2003년을 기점으로 한국 영화에서도 미술의 이용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그 해에 '장화 홍련'(김지운 감독),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올드보이'(박찬욱)처럼 미술적 효과에 신경 쓴 작품들이 연속 발표됐다. 이후 우리 영화는 미술적 효과를, 좁게는 특정 그림의 효과를 작정하고 만든 작품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영화 '아름답다'에 등장한 김흥수 화백의 누드화

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된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은 개봉 전부터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1866)을 이용했다. 이 그림은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여성의 성기를 묘사한 악명 높은 누드화다. 마리화나를 피우다 파리로 도망간 화가 성남(김영호)이 오르세미술관에서 '거칠고 직접적인' 쿠르베의 에로티시즘을 현지 여학생과 함께 보고 있다. 그림 앞에서 성남은 어색해하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 계속 머문다. 왜 그럴까?

프로이트가 봤다면, 아마도 '죽음 충동은 에로티시즘에 물들어 있다'는 자신의 말을 뇌까리며 성남의 심리를 해석하려 들 것이다. 생명의 탄생이자,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는 여성 성기를 그린 작품 앞에서 성남이 서성일 때, 그는 에로티시즘을 넘어 죽음으로의 충동에 유혹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림을 이용하여 캐릭터를 설명하고 관객에게 영화 자체에 계속 질문을 던지도록 하는 효과는 김기덕 감독이 자주 이용했다. 그와 에곤 실레와의 친화력은 널리 알려졌는데, '파란대문'(1998)과 '나쁜 남자'(2002)의 주인공들은 모두 에곤 실레의 여성누드화에 매혹된 여성들이다. 비쩍 마르고 불결하게 때가 묻은 초상화 속의 소녀들에게 마음을 뺏긴 영화 속 여성들은 결국 그 소녀들처럼 착취당하고 병들어가는 식이다.

'아름답다'(전재홍 감독)는 김흥수 화백의 누드화를 이용하여, 매혹적인 여성의 역설적인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주인공을 풍자한 '달콤 살벌한 연인'(손재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처럼 얼굴이 없는 주인공을 다룬 '검은집'(신태라) 등 초상화의 이미지로 영화 인물의 성격을 암시한 경우도 있다. 


그림이 내러티브 전체를 암시하는 작품도 나오고 있다. 개봉을 앞둔 '나의 스캔들'(신정균 감독)은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1648)를 즐겨 그리는 소년이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1882)를 좋아하는 여성을 흠모하는 이야기다. 상대 여성을 비너스처럼 바라보는 소년이 피그말리온처럼 불가능한 사랑을 성취할지에 관한 멜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