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3.21 09:31
무대위 몸짓 열정을 토하다
김씨는 국내 최고령 남자 앙상블(댄서)이다. 지난 99년 '페임'으로 데뷔해 10년째 앙상블 배우로만 활동 중이다. 그동안 '에비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 10여편의 묵직한 작품에 출연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아는 관객은 거의 없다.
뮤지컬에서 앙상블은 무대에서 춤을 전담하는 배우들이다. 가끔 합창을 들려주기도 한다. 대개는 주연, 조연을 도와주며 무리지어 춤을 춘다. 현재 '쓸만한' 앙상블 배우는 100명 정도다. 하지만 설움이 많다. 주연, 조연과 달리 메이크업도, 헤어도, 몸풀기도 직접 해야 한다. 제작진은 '스스로 컨셉트를 잡아서 준비하라'고 주문한다. 말이 좋아서 그렇지, 찬밥 대우다. 리허설 때도 '(무대에 있지 말고)연습실에서 맞춰보고 나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주연과 똑같이 공연 시작 2시간 전에 나와서 준비를 한다.
그런데도 김씨는 "행복하다. 좋은 시절이 왔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부심이 대단했다. "앙상블 없는 작품은 없다. 앙상블은 최고의 배우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개런티가 안맞으면 안한다고도 했다. "40세가 돼서도 무대에 서고 싶다. 그러면 누군가 공로상을 주지 않겠느냐"고 활짝 웃었다.
"굶어죽지 않을 정도"라지만, 수입이 꽤 짭짤하다. 한 기획자는 "김씨 정도면 한달에 250만~300만원은 줘야 한다"고 귀띔했다. 회당 연습비 4만~5만원은 별도다. 초보 앙상블의 개런티는 회당 30만원 정도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한다.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제품 론칭쇼, 축하쇼에도 참가한다. 한달에 2, 3회 뛴다. 10여분 공연하고 30만원 정도 받는다. 김씨는 "지난해 연봉이 3500만원쯤 된다"고 공개했다. 일반 회사원에 비해 적지 않은 액수다. 돈을 모아서 한달전 한남동 원룸으로 이사했고, 난생 처음 부모님에게 선물도 했다. 돌침대를 사 드렸다.
좀 의외지만, 팬클럽도 있다. 2001년 '피핀'의 부산공연 때 TV 스팟광고가 나갔는데, 한 여성이 주연배우 옆에 서 있던 그에게 관심을 보였단다. 동갑내기인 회사원 이 모씨는 7년 동안 김씨의 출연작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봤다. 그것도 한 작품당 꼭 10번을 채웠다. 이씨 외에 20여명의 팬클럽이 활동 중이다. 빅스타처럼 겹치기 출연을 할 때도 있다.
미래가 불확실해 한때 배우의 꿈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2001년 말부터 3년간 무대를 떠났다. 무용학원에서 재즈댄스, 현대무용을 가르쳤다. 대학원(단국대 공연예술학부)도 다녔다. 그래도 왠지 허전했다.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때 스타 안무가인 서병구씨의 전화가 왔다. "행복하냐. 돌아오라"고 하길래 주저없이 컴백했다.
김씨는 "알려지고 싶어서 배우 하는 게 아니다. 행인으로 출연해도 그냥 무대에 서는 자체가 재미있다"고 말했다. 물론 주연에 대한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앙상블이 잘 해야 작품이 산다. 약방의 감초다"는 신념이 있다. "주연이 해바라기라면 앙상블은 풀이다. 풀이 있어야 꽃이 더 빛나는 법"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원래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워커힐호텔에서 연회장 담당으로 1년 가량 일했다. 우연히 종로 거리를 지나다가 '페임'의 오디션 공고를 보고 원서를 내 합격해 데뷔했다. 2007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김선영과 배해선이 동기다. 요즘도 같이 시장을 보러 다니는 등 절친하게 지낸다. 이후 뮤지컬을 위해 용인대 현대무용학과에 편입해 춤을 배웠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반, 무용학원을 다니며 준비했다. 요즘도 한달 40만원씩 투자해 노래를 배운다.
김씨는 휴일이면 한강둔치를 25km가량 뛰고, 아령과 수영도 빼놓지 않는다. 오이팩, 시트지로 얼굴을 가꾸고 피부관리도 받는다.
황당한 사례도 겪었다. 앙상블의 출연료를 떼먹는 제작자도 있었다. 몇년 전 체코 수입 뮤지컬에 출연했는데 개런티의 4분의1을 못 받았다. 그런데 개인파산을 신청했던 제작자가 1년 후 다른 작품으로 오디션을 보더란다. 김씨는 "벼룩의 간을 빼먹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그래도 팬들의 사랑이 있어서 기쁘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앙상블 팬클럽이 있어서 매일 과일과 주스 선물이 들어와요. 우리가 주연, 조연들에게 나눠줍니다. 시대가 그만큼 바뀐 거죠." 앙상블의 위상이 높아진 데 대한 뿌듯함이 김씨의 얼굴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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