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3.19 22:59
벨 칸토 오페라의 대표적 작곡가이자 라이벌이 바로 벨리니와 도니체티입니다. 작곡가도 흥행 공식을 알고 있었다고 할까요. 이들의 오페라에는 극중 소프라노가 정신을 잃고 자신의 정념과 분노, 애환과 환희를 모두 담아내는 '광란의 장면(Mad Scene)'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길게는 20여 분에 이르는 이 장면을 통해 소프라노들은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모두 쏟아내야 합니다. 이 순간만큼은 오페라도 종합예술이 아니라 사실상 1인극으로 변합니다.
도니체티의 대표적인 벨 칸토 오페라 걸작이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입니다. 원치 않는 결혼이 서서히 광기와 살인으로 치닫는 3막에서 여주인공 루치아는 손에 피를 묻힌 채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고향을 그리워하던 주인공은 서서히 착란에 빠져들면서 사랑했던 연인과 가상 결혼식을 올린다는 환상에 이르고 맙니다.
마리아 칼라스 이후 모든 소프라노에게 이 역할은 절대적인 도전 과제였습니다. 다음달 국립극장에서 이 역할을 맡는 소프라노 박지현은 "칼라스의 '루치아' 이후에 콩쿠르에서 젊은 소프라노들이 이 오페라를 과제 곡으로 택하는 비율은 거의 80%에 이른다. 그만큼 도전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까다로운 기교 때문에 피아니스트들에게 작곡가 리스트(Liszt),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파가니니(Paganini)가 도전의 대상이듯, 소프라노들에게는 '루치아'가 있다는 뜻이었지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루치아' 가운데 한 명이 프랑스의 초절 기교 소프라노인 나탈리 드세이(Dessay)입니다. 2002년 1월 프랑스 리옹의 공연 실황에서 드세이는 '광란의 장면'에 몰입한 나머지, 의상이 흘러내려 가슴이 노출되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노래합니다. 당시 실황을 담은 영상물(EMI) 인터뷰에서 드세이는 "루치아의 절망과 고통에 빠져있어서 절반은 벗고 다닌 것조차 몰랐다. 하지만 잘못된 건 아니다"고 말합니다. 국내에도 소개된 이 영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그녀가 벗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주인공 역을 소화하는 가수도 그만큼 광란에 몰입해야 한다는 점이겠지요.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는 성악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4월 1~4일 오후 7시30분 국립극장, (02)586-5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