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지휘봉, 감동을 조율하는 10g의 마력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3.12 23:36 | 수정 : 2008.03.12 23:37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스스로 깎아서 만든 지휘봉을 대통령에게 건넸습니다. 정명훈이 지난 2005년 3월 서울시향 음악 고문으로 취임할 때,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 대통령이 선사한 지휘봉에 대한 답례라고 합니다. 정명훈은 프랑스 자택의 올리브 나무에서 가지를 잘라 지휘봉을 만든 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거나 자선 경매에 내놓기도 합니다.

지휘봉은 때로 꿈을 심어줍니다. 최근 세계적 음악 매니지먼트 회사인 아스코나스 홀트와 계약한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경매에서 샀던 것도 정명훈의 지휘봉입니다. 하나는 온전한 것이었지만, 하나는 공연 도중 부러진 지휘봉이었다고 하지요. "언젠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고 싶다"는 꿈을 키워오던 소년 김선욱에게 정명훈의 지휘봉은 일종의 강력한 자기 암시이자 주문이었을 것입니다.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왼쪽) 취임식에서 기념 연주를 마친 지휘자 정명훈이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지휘봉은 100 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통솔하는 카리스마의 상징이지만, 맨손이나 이쑤시개 길이의 미니 지휘봉을 애용하는 지휘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영화 '오케스트라의 소녀'로 유명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명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는 열 개의 손가락으로 지휘를 대신해서 '맨손 지휘의 원조'로 불렸지요.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과 런던 심포니를 동시에 이끌고 있는 러시아의 명 지휘자 게르기예프 역시 이쑤시개 크기의 미니 지휘봉이나 맨손으로 지휘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하긴 지휘봉이 크다고 해서 더 큰 소리가 나오진 않겠지요.

열정에 넘쳐 상하좌우로 흔들다 보니 지휘봉은 '사고 다발' 악기이기도 합니다. 지난 2004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는 일본의 NHK 교향악단을 지휘하며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3번을 연주했습니다. 지휘하던 도중 오른손에 쥐고 있던 지휘봉이 왼손을 강하게 찔렀고, 피가 흐르는 바람에 후반부의 교향곡 4번은 악장에게 넘기고 병원에 실려갔다고 합니다. 다음 연주회에선 지휘봉 없이 붕대를 감은 손으로 지휘하는 '부상 투혼'을 보였다고도 하는군요.

대략 40㎝ 길이와 10g 안팎의 무게인 지휘봉은 악기점(店)에서 싸게는 1만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는 '가장 싼 악기'입니다. 동시에 지휘봉은 오케스트라에서 혼자서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유일한 '악기'입니다. 아마도 지휘봉 선물에는 스스로의 목소리는 낮추고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는 주문도 함께 담겨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