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거문고에 빠진 다국적 밴드"

  • 최승현 기자

입력 : 2008.03.05 22:58 | 수정 : 2008.03.06 08:50

한국·영국·호주·브라질 4인 '이정주 앙상블'

4일 오후 7시 서울 이태원 한 카페. 19개 줄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자 가라앉아 있던 어두운 공간에 활력이 꿈틀댄다. 한국 연주자는 거문고(6현)를 뜯고, 영국인은 터키 전통악기 사즈(saz·7현)를, 호주인은 기타(6현)를 끌어안고 연주한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즉석 공연을 가진 이들은 한국의 이정주(41)씨를 중심으로 호주의 다미 캐그니(Cagney·서울산업대 교수), 영국인 브라이언 로즈(Rose·서울하비에르 국제학교 교사)씨가 뭉친 다국적 밴드 '이정주 앙상블'. 앙상블의 나머지 멤버인 브라질의 타악기 주자 발티뇨 아나스타시요(Anastacio)씨는 이날 참석하지 못했다.

이 다국적 밴드가 특별한 건 '거문고' 때문에 결성됐다는 사실이다. 2005년 6월 이정주씨의 전자 거문고 연주를 듣고는 '처음 느껴보는 신비로운 현의 울림'에 흠뻑 빠져버린 서양인들은 "거문고의 한계를 시험해보자"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했다. 이정주씨는 "사즈, 거문고, 기타가 한데 모인 밴드는 세계에서 우리가 유일하다"며 웃었다.

거문고를 중심으로 뭉친 다국적 밴드‘이정주 앙상블’의 연주 모습. 왼쪽부터 브라이언 로즈(사즈), 다미 캐그니(기타), 이정주(거문고)씨.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연주를 마치고 나면 마치 즐거운 대화를 나눈 느낌이에요. 서로 다른 국적과 경험,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합주를 하니까 이게 진정한 퓨전(fusion) 아니겠어요?"(이정주)

캐그니씨는 "기타와 거문고는 뿌리가 완전히 다른 악기인데 희한하게도 함께 연주하면 잘 어울리면서 서로의 소리를 보완해준다"고 했다. 그는 "거문고 소리는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독특한 소리였고 자꾸만 그 소리를 듣고 싶어 밴드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전통 음악과 거리의 음악을 수집하는 로즈씨는 "중국일본에서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는 만났지만 거문고처럼 낮고 웅장한 소리를 내는 현악기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15년 전 터키를 여행하다가 사즈의 음색에 빠져 아예 전문가에게서 연주법을 배웠다.

지난 2년 반 동안 국내에서 크고 작은 공연을 열었던 이들은 작년 여름 프랑스 12개 도시를 도는 투어도 벌였다. 총 5000여명의 프랑스 관객들이 이들의 연주를 직접 들었다. 이씨는 "일본과 중국 음악은 머리로 생각하며 듣게 되는데 한국 전통 음악은 가슴에 먼저 와 닿는다"고 했다. 오는 6월 20, 21일에는 국립극장에서 팬들을 만난다.

이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인 '한갑득류' 거문고 산조를 이수했다. 전남도립국악단 기악부 상임단원으로 활동하다가, 95년 한일 음악페스티벌에서 한국과 일본 전통음악이 정상급 재즈와 멋진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고 퓨전 국악에 투신했다. 그가 전자 거문고를 연주하며 록 밴드와 함께 무대에서 '헤드뱅잉'을 할 때 옛 스승들은 "네가 미쳐가는구나"라고 한탄도 했다. 그는 그러나 우리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망설임 없이 전진했다. 로즈씨는 "음악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이씨의 자세는 존경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