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3.06 00:05 | 수정 : 2008.03.06 00:25
내 생애 처음 그림 산 날
'족집게 안목' 수집가 정 기 용
그는 대학 졸업 후 인천에서 외가 친척이 운영하는 회사에 다녔는데 회사는 1주일에 한두 번 가고, 나머지는 서울 와서 박물관과 인사동으로 미술품 구경을 다녔다. "당시 인천에 '조대포'라는 인기 있는 대폿집이 있었는데, 외상 안 해주기로 유명한 집이었어요. 당시 1만원이면 한 달치 월급이 넘은 것 같은데, 당장 현금이 없는데 꼭 갖고 싶은 그림이라 현금이 많은 대폿집 주인에게 이자 쳐주고 꿔서 샀지요."
무너질 것 같은 초가(草家)를 파초와 나무들이 둘러싼 모습을 칼칼한 먹으로 그린 풍경화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지금도 그의 안방을 지키고 있다. 그는 "이자 물어 가면서도 집에 걸어 놓고 너무 좋았던 기억 때문에 이 그림은 절대 팔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 후 백남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의 명작들과 샤갈, 로트렉, 이브 클라인, 요셉 보이스, 장 포트리에, 시몬 한타이, 조앤 미첼 등 서구 대가들의 작품들이 그의 화랑을 거쳤다. 그것도 작가의 작품세계를 상징하는 대표작들만 골라내는 안목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그의 집 거실에는 김환기의 대형 추상회화가 걸려 있다. 그러나 동시에 깨진 도자기 조각들과 그의 학창시절 김순배 미술선생님이 1960년에 찍은 흑백판화 '달과 배'도 식탁 옆에 걸려 있다.
미술에 빠져 사느라 일견 가족에 무관심해 보이는 정씨다. 그러나 그는 '그림이 있는 집' 캠페인 이야기가 나오자 방에 들어가 누런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나왔다. 봉투 속에서는 아들 범수(41)씨가 5살 때 볼펜, 사인펜, 크레파스 등으로 그린 그림 2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아빠와 엄마, 동생, 토끼를 그린 것과 노을을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는 "골수(骨髓)가 제대로 들어 있고 품격 있는 미술품이 좋은 작품"이라며 "어린 아이들이 별 생각 없이 그린 것 같지만 그 가운에서도 골수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