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2.27 18:01 | 수정 : 2008.02.28 14:53
“너무 힘들어 도망쳤는데 무대가 그리워 더 힘들더라고요”

최태지(49) 신임 국립발레단장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부터 매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고 일본, 프랑스, 미국에서 발레를 배웠으며 20대 중반이 돼서야 한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1996년 처음으로 국립발레단장이 됐고 2001년도까지 2년씩 세 번을 연임했으며, 3년6개월간 정동극장장을 맡다가 올 초 다시 국립발레단으로 돌아왔다.
지난 2월 18일 본사 주필 서재에 들어온 최 단장은 스타 발레리나 출신답게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흑백이 조화를 이루는 양장을 곱게 차려 입은 그녀는 일본어 억양이 섞인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당차고 야무지게 풀어나갔다. 무용수 출신다운 화려한 손동작이 그녀의 주장을 한층 더 설득력 있게 해줬다.
스타 발레리나에서 경영자로
[강천석] 심사위원 만장 일치로 국립발레단장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경영자로서 최 단장의 성공이 뜻밖인 동시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스타 플레이어 중에서 성공한 감독이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죠. 이는 조직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을 간수하기에 급했기 때문이라고들 해요.
[최태지] 저 역시 발레를 하는 동안 항상 고독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발레를 그만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죠. 대신 결혼할 때까지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국립발레단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 재임 기간만이라도 열심히 일하자는 생각으로 임했죠. 이처럼 목표를 길게 잡지 않고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최선을 다하다 보니 경영자로서의 안목과 경험이 오히려 더 잘 축적된 것 같아요.
[강] 이전에 국립발레단장으로 재직할 때는 어떤 변화를 시도했나요.
[최]먼저 ‘해설이 있는 발레’를 만들어서 야외무대로 나갔습니다. 당시 저는 바닥만 미끄럽지 않으면 어디든지 찾아가겠다고 했죠.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공연 기회가 많아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착이 됐습니다. 또 국립발레단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동호회가 생겼고 발레 팬들의 다양한 반응을 체크할 수 있게 됐죠.
[강] 최 단장 재임 당시 국립발레단이 재단 법인화되었는데요.
[최]국립발레단이 국립극장에서 예술의전당으로 이전되면서 자체 예산 확보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어눌한 한국말로 예산 확보를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술을 잘 못해 사이다 섞은 소주를 마시며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심정으로 뛰었죠.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공격적으로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스파르타쿠스’ 등 러시아의 유리 그리가로비치 선생님의 작품 세 편을 샀습니다. 양질의 콘텐츠 확보를 위해서 말이죠. 유리 선생님은 볼쇼이 발레단에서 30년간 예술감독을 한 분입니다. 일각에서는 외화 낭비라고 비난도 했지만, 지금은 해외 공연 때마다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그 작품들로 외화를 벌어오고 있는 셈이죠.
[강] 작년까지 3년 6개월 동안 정동극장장으로 일할 때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죠.
[최] 최태지의 정동데이트, 아트 프론티어, 상설 공연 등을 만들었고, 레스토랑도 열었습니다. 하지만 전체 공연 수를 줄이고 질을 높이려다가 국정감사 때마다 불려가서 고생 많이 했어요. 거의 국회에서 살면서 의원님들을 설득시키고 이해시켰지만 말이죠.

백조가 된 미운 오리새끼
[강] 발레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요.
[최]저는 일본 교토의 바닷가 마을인 마이즈루(舞鶴)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언니가 무척 예뻤고 부모님의 관심을 독차지했어요. 그래서 저는 일종의 미운 오리새끼였어요. 그런데 발레는 언니보다 제가 더 잘했고 부모님 칭찬을 들을 때마다 신이 나서 열심히 했어요.
[강] 그야말로 미운 오리새끼에서부터 백조가 되었네요. ‘춤추는 학’이라는 뜻을 지닌 마을에서 태어났으니 발레리나가 될 운명도 있었나 봐요.
[최]부모님의 적극적 지원이 큰힘이 됐죠. 자갈 채취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제게 ‘예술은 하루 아침에 돈으로 살 수 없다’면서 용기를 북돋워 주셨어요. 어머니께서는 도쿄까지 운전해서 제게 많은 공연을 보여 주셨고요. 또 ‘남과 싸우면 항상 네 잘못이 없나 먼저 돌아봐라’면서 겸손과 인내를 가르쳐주셨고요.
[강] 그런데 대학에서는 발레가 아닌 프랑스어를 전공했습니다.
[최]일본 대학에는 발레학과가 없습니다. 교습소에서 배워야 했죠. 발레에 쓰이는 언어가 프랑스어였고 인문학적 교양을 쌓고 싶어서 프랑스어를 전공했어요.
[강] 재일동포로 생활하며 어려움은 없었나요.
[최] 일본에서 해외 유학을 위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국적이 일본이 아니라는 이유로 못 받았습니다. 저를 지켜보시던 일본 발레 협회장께서 한국에 가보라고 권하셨어요. 1983년 처음 한국으로 왔고 ‘해적’ 공연 무대에 섰습니다. 하지만 1985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갔고 ‘발레를 그만두고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을 했죠. 발레 대신 아이를 선택한 거예요. 당시 제 몸무게가 78㎏까지 나갔는데 살찐 제 모습이 너무 예쁘게 보였어요.
[강] 발레리나는 결혼하면 50% 타격을 입고 출산을 하면 80% 타격을 입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복귀했나요.
[최] 고1 때 발레 선생님이 ‘발레의 신(神)이 너를 찍으면 결코 못 빠져 나올 거야’라고 했는데, 저는 그 말이 너무 싫었어요. 발레 선생님들처럼 힘들게 살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점점 무대가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결국 선생님 말이 맞았나 봅니다.
[강] 헤어나올 수 없는 발레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최] 음악 속에 자신을 던져 ‘무아지경’에 이를 때가 가장 행복하고 매력적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선율을 따라가며 춤을 추는 거죠. 그 때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잠시나마 중력을 이기고 비상할 수 있는 것도 발레의 매력이 아닐까요.
[강] 1987년 국립발레단원이 된 후 언제까지 무대에 섰나요.
[최] 1990년대 중반 ‘해적’ 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났죠. 우연히도 알파(시작)와 오메가(끝)가 ‘해적’이었습니다.
[강] 지금까지 여러 역할을 해봤을 텐데 그중에서 자신과 가장 잘 맞는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최] ‘백조의 호수’에서 한 무용수가 백조와 흑조를 함께 맡아요. 이렇게 180도로 변신하는 역이 좋아요. 또 저를 키워주신 임성남 선생님의 ‘왕자 호동’에서 맡은 낙랑공주 역도 기억에 남아요. 나라와 아버지를 지키느냐 아니면 남편과 사랑을 선택하느냐를 고민하는 드라마틱한 면이 인상적이죠.
[강] 만약 현실에서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최] 갑자기 지난 연말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네요. 국립발레단장이 됐다는 소식은 전해드렸는데 크리스마스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한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고 ‘항상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강] 발레보다 사랑해서 낳은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나요.
[최] 딸만 둘인데, 큰딸(최리나)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레를 배웠고 예원학교를 거쳐 캐나다 유학까지 다녀왔습니다. 어릴 적에는 울면서 제게 발레를 그만두면 안되냐고 했는데 그 아이도 결국 발레리나가 됐어요. 키가 177㎝나 돼서 국내 무대에서는 잘 안 어울려 러시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에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했는데 최근 통화에서 무척 대견하다고 느꼈어요. 제게 나폴레옹이 한 말을 들려주더군요. ‘마지막 무기는 내 손에 있다. 그것은 용기다’라고요. 작은 딸(최세나)은 발레를 하다가 그만두고 대입 준비를 하고 있어요.
[강] 발레리나로서 이상적인 신체조건은 어떤 건가요.
[최] 아무래도 얼굴은 작고 다리가 길어야죠. 8등신보다는 10등신이 낫고요. 부모님들께서는 자녀의 신체적 조건을 먼저 따져보고 발레를 시키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러시아에서는 할머니 신체조건까지 따져볼 정도예요.
[강] 경영인으로는 성공했지만 아내로서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최] 다음 생에는 꼭 내조 잘하는 여자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남편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항상 가정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했는데 계속 사회의 부름을 받아 살림에 신경을 잘 못쓰는 여자가 돼버렸어요.
[강] 그래도 요리는 무척 잘한다고 들었습니다. 김치찌개와 낙지볶음이 특기라고 하던데요.
[최] 바빠서 매일 밥을 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들에게만이라도 최대한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김치찌개에는 돼지고기를 많이 넣어 조화를 맞추고 낙지볶음은 꼭 소면과 함께 만들고요. 그리고 야채를 많이 먹이려고 노력하죠. 러시아에 가면 양파를 올리브유에 볶아서 큰딸 냉장고 냉동실에 넣어놓고 오지요. 한때 지인들과 한정식집을 운영했을 정도로 요리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