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2.22 09:01
사진작가 구본숙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지휘자,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연습에 몰두중인 바이올리니스트, 심각한 얼굴로 악보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첼리스트… 사간동 갤러리 온 입구에 들어서자 잔잔한 클래식 선율과 함께 선연한 흑백 사진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메이크업도, 의상도 준비되지 않은 연주자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담아낸 이 사진들은 바로 사진작가 구본숙의 작품.
그녀는 6년째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 적을 두고 연주 전문 사진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오케스트라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실연 장면부터 연주자 개개인의 초조한 무대 뒷모습까지, 그들의 음악을 향한 열정은 고스란히 그녀의 렌즈에 담겨 또 하나의 감동을 만들어낸다.
사실 음악은 오랜 세월 타 예술장르와 서로 영감을 주고받아 왔다.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故백남준 역시 스스로 연주도 하고, 악기와 관련된 퍼포먼스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처럼 이곳에서는 음악이라는 찰나의 시간 예술이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영속성을 띈 시각적 공간 예술로 재탄생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의자며 침대며 모두 하얀색인 거예요.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하얀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리는데, ‘아, 이런 게 행복인가’ 싶더라고요. ‘이런 행복한 순간을 표현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시를 쓸까? 음악을 할까? 그림을 그릴까? 사진을 찍을까? 그래, 사진이라면 잘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건방진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원래 제가 좀 무모하거든요.(웃음)”
체육학을 전공하고 레저 강사로 일하던 그녀는 여행지에서의 이 경험을 계기로 돌연,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월급을 탈탈 털어 카메라를 구입했고,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을 소개받아 그의 작업실을 들락거리며 본격적으로 사진에 입문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8살.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하기엔 충분히 망설였을 법도 한 나이. 허나 그녀는 단호했고, 카메라를 손에 잡은 지 불과 2달 만에 서울예술대학 사진과에 덜컥 합격했다. 그녀 특유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지인의 소개를 통해 금호 리사이틀홀에서 아르바이트로 영상 일을 하게 된 그녀. 평소 음악에 별 조예가 없던 그녀는 그곳에서 클래식 음악의 매력에 단박에 빠져들고 만다.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아티스트들의 모습을 보며 넋을 잃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를 여러 차례. 그녀는 급기야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부이사장에게 찾아가 당돌한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제 전공이 원래 영상이 아니라 사진이라고, 필요할 때마다 번거롭게 외부 사진작가를 쓸 게 아니라 그냥 저한테 다 맡겨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드렸어요. 듣고 보니 괜찮겠다 싶으셨는지 흔쾌히 수락해 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금호아트홀에 찾아오는 무수한 유명 오케스트라들을 촬영하는 일은 모두 그녀의 몫이 됐다. 위에서 망원으로 찍는 오케스트라도 좋았지만, 그녀를 진정 매료시킨 것은 바로 무대 뒤, 만감의 교차가 엿보이는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고. 그녀는 곧바로 오케스트라의 솔직 담백한 리허설 풍경을 찍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치 나만을 위한 연주회라는 느낌?(웃음) 리허설 현장에선 제가 유일한 관객이니까요. 무대 위에선 볼 수 없는 그들의 날 것 같은 연주와 다채로운 표정을 훔쳐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죠. 일단은 멀찍이서 그들이 집중하길 기다려요. 완전히 몰입해서 저라는 존재를 다들 잊어버린 순간, 맨발로 조심조심 다가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죠. 리허설만 가면 힘든 것도 싹 잊어버려요. 저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니까요.”
6년 간 수백 명의 국내외 연주자의 리허설 장면을 찍다 보니 흠모하는 아티스트도 생겼다. 파리 오케스트라의 에센 바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로린 마젤은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지휘자들. 한편 어느 첼리스트는 그녀의 사진을 두고 ‘마에스트라! 영혼을 찍는 사진가’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영어가 짧아서 처음엔 못 알아들었어요. 곁에 있던 사람들이 굉장한 칭찬을 들었다며 설명해주더라고요.(웃음)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의 최종 목표는 국내외 음악가들의 사진을 총망라해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것. 특히 외국에서 한국 아티스트의 사진을 필요로 할 때 서슴없이 ‘구본숙’이라는 이름을 떠올려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단다. 아마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땀방울도 그녀가 찍는 아티스트들의 그것만큼이나 빛나고 있지 않을까.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