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속죄의 '라 보엠'

  • 김성현 기자
  • 정남이 인턴기자

입력 : 2008.02.02 02:37

흰색 소파가 유일한 소품 60년 한국오페라의 초라한 초상

3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입장하는 관객들의 티켓에는 모두 '초대권 가격 0원'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난해 연말 오페라 '라 보엠'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화재 사건으로 중단된 뒤, 당시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들을 위해 국립오페라단이 전석(全席) 무료로 마련한 무대였다. 음악계에서는 이를 '속죄의 라 보엠'이라고 불렀다.

공교롭게 화재가 일어난 공연 1막 당시, 화재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두 성악가의 등장과 함께 막이 올랐다. 로돌포 역의 테너 신동호와 마르첼로 역의 바리톤 오승용이었다. 이들은 돈과 빵 없이 오로지 상상력으로 버텨야 하는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을 노래로 묘사했다. 화재 사건으로 극장과 무대 없이 헐벗고 가난한 처지인 건 한국의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다.

이날은 별도의 무대 없이 공연 당시 의상만 입고서 간단한 연기와 함께 콘서트 형식으로 열렸다. 지난해 12월 12일 화재 당시 공연장에 있었던 주부 오정자(46)씨는 "불이 났을 때 무대 연출인 줄 알고 '실감 난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 공연을 보지 못해 속이 상했는데 다시 볼 기회가 생겨서 기쁘다"고 했다.
국립오페라단은 지난해 12월 오페라‘라 보엠’공연 도중 일어난 화재로 공연을 관람하지 못한 관객들을 무료 초청해서 지난달 3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했다./국립오페라단 제공
크리스마스 시즌의 화려한 프랑스 카페 거리를 담아야 할 2막에서는 오케스트라와 객석 사이의 공간에 합창단원들이 자리를 잡느라 비좁은 모습이었다. 2막 말미 늠름한 행진을 펼쳐야 하는 군악대는 무대 한쪽 귀퉁이에 몰려서야 했다.

무대와 연기가 없는 대신, 성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소득이었다. 지난해 연말 공연에 캐스팅됐던 성악가들이 주요 배역을 나눠서 맡은 것과는 달리, 미미 역은 소프라노 김세아가 4막까지 모두 불렀다. 단아하면서도 호소력을 갖춘 목소리로 별다른 과장 없이 여 주인공을 묘사했다. 3·4막에서 바리톤 이응광은 풍부한 성량과 진지한 동작으로 마르첼로 역을 소화했고, 1막에서 베이스 함석헌은 능청 맞은 연기와 노래로 객석에 웃음을 불어넣었다.

오페라 4막에서 여 주인공 미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몸을 뉘었던 흰색 소파가 이날 무대의 유일한 소품이었다. 1948년 '라 트라비아타' 초연 이후, 올해 60주년을 맞은 한국 오페라의 초상은 '라 보엠'의 결말처럼 처연하고 슬펐다. 국립오페라단은 올해 연말 '라 보엠'을 다시 오페라로 올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 때쯤이면 '속죄의 라보엠' 대신 '재기(再起)의 라 보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