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말러, 사후에 더 빛난 영원한 이방인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8.01.31 02:38

작곡가 말러(Mahler·사진) 탄생 125주년이었던 1985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Bernstein)은 영국 BBC 방송의 말러 다큐멘터리에 해설자로 참여합니다. '북 치는 작은 소년'이라는 영상의 첫 장면부터 번스타인은 단호하게 말러가 유대인 작곡가라고 못 박습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위험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러의 음악은 그 어느 때보다 유대인의 음악처럼 들린다"는 것입니다. 유대계 지휘자인 번스타인은 피아노 건반으로 말러의 교향곡 1번 3악장을 직접 연주하면서 유대인 결혼식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멜로디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바흐와 모차르트, 슈베르트와 브루크너로 이어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음악적 유산을 물려 받았지만, 동시에 수세기 동안 수많은 나라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離散) 경험이 녹아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체코 출신의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Kubelik)은 자전적 영상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작곡가를 묘사합니다. 말러는 언제나 들판과 숲에서 나오는 자연의 노래를 느끼고 들었으며, "마치 스메타나와 드보르작, 야나체크가 그랬던 것처럼 중부 유럽이 그의 음악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쿠벨릭의 설명을 듣다 보면, 말러는 영락 없이 체코 출신의 작곡가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후배 지휘자들이 각자 말러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건, 말러 자신이 복합성과 혼혈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러가 태어난 보헤미아 지역은 지금의 체코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핏줄로는 온전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조금은 외람되지만 식물에 비유하면, '원산지는 체코, 재배지는 오스트리아 빈, 종자(種子)는 유대계'였던 셈입니다.

작곡가 자신도 "나는 삼중(三重)으로 고향이 없는 사람이어서 오스트리아 사람들 중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이요, 독일인들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요, 세계에서는 유대인이다. 어디를 가도 이방인이요,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생전(生前)에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토로했지만, 정작 사후(死後)에는 모든 곳에서 환영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으니 음악가로서 복이라면 복입니다.

지휘자 정명훈은 지난 2004년 10월부터 2005년 6월까지 8개월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해서 프랑스 전역에서 호평 받은 '말러 스페셜리스트'입니다. 그는 기자 간담회에서 "말러의 교향곡 9번은 저한테도 무리예요"라고 하면서도 "말러의 곡은 관현악 레퍼토리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며 오케스트라의 전체 실력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도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말러와 체코의 말러가 가능하다면, 한국의 말러가 불가능하다는 법은 없을 테지요. 정명훈은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말러 교향곡 전곡 사이클도 계획 중이라고 합니다. 올해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들려줄 말러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