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술사다

  • 글·사진=김미리 기자

입력 : 2008.01.24 23:57 | 수정 : 2008.01.25 02:48

조명 디자이너 이상진씨, 그의 손을 거치면 일상 소품도 예술로 탈바꿈
"기성품 쓰임새를 뒤집어 유머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조명 디자이너 이상진(43)씨는 일상 속 소품을 주연으로 변신시키는 '연금술사'다. 집안 구석 뒹구는 파리채가 그의 손을 거치면 전등갓으로 탈바꿈한다. 시장에 널려 있는 빨간 소쿠리, 싸구려 지퍼도 색다른 조명 작품이 된다.

"제 몫을 지니고 만들어진 '기성품'의 쓰임새를 뒤집어 유머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종이컵에 꽃을 심으면 생산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화분이 되는 것처럼요." 이씨는 일상의 재발견을 통한 작품 세계로 주목 받고 있는 신진 디자이너. 지난해 권위 있는 영국 디자인 전문 출판사인 '페이든(Phaidon)'에서 발행한 디자인집 '앤드포크(&fork)'에 '세계 100명의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실렸다.

'기성(旣成)'을 뒤틀어 만든 작품처럼 그는 '레디메이드 인생'을 거부해왔다. 첫 직장은 LG전자 디자인연구소. 대학(서울대 공업디자인과) 졸업 후 연구소에서 소형가전을 디자인했다. 주특기는 밥솥. 청소기 모양 전기밥솥으로 '굿디자인상'도 받았다. "웬만한 디자인은 한달 반이면 뚝딱 해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기계 부품처럼 영혼 없는 디자이너가 돼 있더군요." 5년간의 연구소 생활은 막을 내렸다.
소쿠리로 만든 조명.
다음 직업은 교수. 1998년 두원공대 산업디자인과 교수가 됐지만, 3년 뒤 몸이 근질댔다. 배움의 욕구를 못 이겨 이탈리아의 도무스(Domus) 아카데미로 유학을 갔다. 안정적인 교수직을 관둔다 했을 때 부모님은 몸져누우셨다. 2003년 귀국 후 전업 작가로 정착했다.

이씨의 작품은 생활의 연장이다. '북마크'라는 이름의 조명은 잠들기 전 책을 읽다가 편 채로 얹어둘 수 있게 만든 작품. 펼쳐진 책이 조명에 얹혀 집 모양이 되고, 조명은 그 자체로 책갈피가 된다. 요즘은 디지털 작업으로 외연을 넓이는 중. 최근작 '라이팅 큐브'는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을 이용했다. 전선으로 엮은 설치물 안에 LED를 촘촘히 박아 넣고, 컴퓨터에 입력한 프로그램을 연결시켜 다양한 조명 형태를 맺히게 한 작품. 샹들리에가 하트 모양으로, 또 이모티콘으로 바뀐다. 이 조명은 지난해 '광주 디자인비엔날레'에 전시했다가 '조명 디자인의 대가'로 불리는 잉고 마우러(Maurer)로부터 찬사 받았다. 지하철역에도 그의 '분신'이 있다. 서울시의 '도시 갤러리 사업'의 일환으로 지하철 3호선 옥수역에 설치된 화분 모양의 승강장 벤치가 그의 작품이다.
지퍼로 만든 조명.
국내 신진 디자이너 그룹에선 '맏형'이다. 산업자원부에서 선정한 '차세대 디자이너' 60여명 중 최연장자. 국내 디자인에 대한 사명감이 남다른 이유다. 이씨는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디자인 사대주의'가 희석되길 간절히 바란다. "전시기획자들이 별 볼일 없는 해외 디자이너 전시에는 거액을 쏟아 붓지만, 훌륭한 국내 디자이너 작품은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객관적인 잣대로 국내 디자이너들을 평가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