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하고 끈질기게 '미래의 백건우'를 향하여

  • 김성현 기자
  • 정남이 인턴기자

입력 : 2008.01.24 00:19 | 수정 : 2008.01.24 05:07

[2008 뉴 클래식 리더] <5·끝> 피아니스트 김준희

지난달 14일 밤 예술의전당 인근의 레스토랑 '더 바 도포'.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 연주회를 마친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축하하기 위해 지인(知人)과 공연 관계자 50여 명이 모였다. 백건우·윤정희 부부에게 축하 건배를 제의하자, 이들 부부는 바로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소년 피아니스트를 바라보며 "미래의 백건우를 위하여!"라고 외쳤다. 건배의 주인공은 지난해 프랑스 롱 티보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한 김준희(18)군이었다.

"깜짝 놀랐죠. 평소에 마주치기만 해도 숨도 못 쉬고 멍할 정도였는데…."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콩쿠르 당시 그는 대회 참가자 33명 가운데 막내였다. 첫 국제 콩쿠르 참가였기 때문에 부담을 갖지 않으려 애썼다고 했다. "테이프 심사를 위해 소나타를 한 악장만 녹음해서 보냈는데 대회 규정에 어긋났나 봐요. 마감을 넘겨가며 부랴부랴 다시 연주해서 보냈기 때문에 입상은커녕 참가도 힘들 줄 알았어요."
대화가 음악 바깥의 일상으로 돌아가자, 피아니스트 김준희(18)군은 영락 없는 10대 소년으로 변했다.“ 친구들은 올해 모두 고교 3학년이 되기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혼자 지내는 법을 더 배워야 할 것 같아요.”세종체임버홀에서 촬영했다. /이태경 객원기자 ecaro@chosun.com
인터뷰 날은 영하 10도를 밑돌았지만, 정작 김준희군은 엉덩이에 땀띠가 가시질 않는다고 했다. 한 번 피아노 앞에 앉으면 5시간씩 일어나지 않는 습관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시달린 '고질병'이라고 했다.

"피아노 연습량은 조금 줄이는 대신 음악 자체에 대한 공부를 늘리려 해요. 땀띠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의 검은 가방에는 작은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노트를 펼쳐보니 "느낌, 개성, 흐름, 악보, 박자, 작곡가"의 순서로 쓰여진 메모가 보였다. "어릴 적에는 느낌이나 개성만으로 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거꾸로 작곡가가 가장 중요하고 박자, 악보, 흐름 순으로 연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적어놓았어요."

작곡가와 작품에 대한 생각부터 자신의 연주에 대한 평가와 스케줄까지 모든 걸 적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메모광(狂)'이다. '브람스'라고 쓴 대목에는 "항상 자제하고 박자에서 이탈하지 말 것, 늘 여유 있게 접근하고 음량의 크기보다는 넓고 깊게 연주하려고 애쓸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끊임 없이 쓰고 지우다가 해가 넘어가면 다음 노트로 넘긴다"며 웃었다.

서울예고 1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해서 올해 대학 2학년생이 된다. 그해 대학 입학 때까지 남은 6개월 동안에는 독일 에틀링겐 청소년 콩쿠르에 참가해서 3위에 입상했고, 그 뒤 5개월 동안은 "자신에게 부족한 대목이 무얼까" 고민하며 알뜰살뜰 보냈다. 지금도 인천의 집에서 서울 서초동 학교까지 등교할 때면 버스나 지하철에서 항상 악보를 꺼내놓고 MP3 플레이어로 들으며 피아노 곡을 익힌다. 그는 "연습을 하지 않는 그 시간도 내겐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달 일본 도쿄의 콩쿠르 입상 기념 협연을 시작으로 4~5월 프랑스 독주회, 7월 31일에는 금호아트홀에서 올해 첫 국내 독주회가 잡혀 있다. 그는 "백건우처럼 따뜻하고 인간적인 소리를 지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