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테이트 미술관 사상 첫 한국인 큐레이터

  • 최보윤 기자(리버풀(영국))

입력 : 2008.01.18 00:11 | 수정 : 2008.01.18 13:02

아시아·태평양 지역 미술품 구매 맡은 이숙경씨
영어 이름 대신 한국 이름 고집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많이 울었죠"

"영국 미술계에 한국인의 능력을 확실히 새겨놓고 싶어요. 여기서도 영어 이름을 쓰지 않고 '이숙경'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현지인들과 멋지게 경쟁하겠습니다."

금발의 서양인들 사이에서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가 눈에 띈다. 영국의 대표적 현대 미술관인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의 큐레이터인 이숙경(38)씨다.

지난해 10월 정식 채용된 그녀는 대영박물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국 최고의 미술관인 테이트 미술관(Tate Gallery) 100년 역사상 첫 한국인 큐레이터다. 테이트 미술관은 1897년 개관한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을 비롯해 이씨가 일하는 '테이트 리버풀'(1988년 개관)을 포함해 4곳으로 나뉘어 있다. 이 미술관은 블레이크, 스펜서, 터너 등 17세기부터 현대 작가까지 총 6만50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영국의 권위있는 '터너 프라이즈' 수상작도 테이트 미술관에서 전시한다.

이숙경씨는 올 가을 열리는 '리버풀 비엔날레 2008'을 비롯, 각종 전시 기획을 맡고 있다. 특히 앞으로 이 미술관이 한국 등 아시아 지역 미술 수집을 늘려나가기 위해 만든 세부 위원회인 '아시아 퍼시픽 구매 위원회'의 책임 큐레이터이기도 하다. 그녀는 "제 경험과 지식이 마침 유용하게 쓰여서 무척 다행"이라고 말했다.
테이트 리버풀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영국 전통 택시‘블랙캡’을 모티브로 한 작품 앞에서 큐레이터 이숙경씨가 작품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리버풀(영국)=조선영상미디어 이상선 기자 sslee@chosun.com

이씨는 뜻밖에도 미술 전공자는 아니다. 홍익대학 예술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재학 시절 내내 미술사와 현대미술이 그냥 좋아서" 결국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공채를 통해 큐레이터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안정된 직장이었지만 그녀는 도전을 택했다. 1996년 영국 문화원 장학생으로 런던 시티대학 예술비평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홀로 떠난 유학 길에선 두려움보다는 알지 못할 자신감이, 외로움보다는 작품을 맞대는 희열이 더 컸다. 그래도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엔 알아듣기 힘든 영국식 영어와 기름투성이의 영국 음식 '피시 앤 칩스' 때문에 애를 먹었다. 1~2년이 지나고 언어가 수월해질 때쯤 또 하나의 장벽이 생겼다. 보이지 않는 계층간, 인종간 갈등을 느끼게 됐다. "영국인들이 무척 보수적이잖아요. 처음엔 참 잘해주는 듯한데 정작 중요한 일엔 쏙 빼놓기도 하고, 똑같은 실력이 있어도 같은 영국 사람들에게 더 기회를 주고…. 시기 질투도 엄청나고요. 혼자 많이 울었죠."

그래도 그녀는 낙천적 성격으로 어려움들을 이겼다. "독특한 영국식 유머와 개방적인 문화는 매력적이잖아요. 그래서 영국을 자꾸 좋아하게 됐어요…."

그녀는 아직 미혼이다. "후배들이 요즘엔 가끔 우스갯소리로 '신정아 사건 이후 결혼 시장에서 큐레이터 인기가 바닥이다'고들 해요. 외로울 때도 있지만 이 작품들과 함께 있으니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그래도 '미술과 결혼했다'는 말을 하진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