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12.03 09:13
뮤지컬 '뷰티풀 게임'의 배우 난아
현악기의 주법 중엔 활 중심부를 현위에서 튕겨주듯 훑으며 연주하는 스피카토라 것이 있다. 빼곡히 들어 찬 음계를 쉴 새 없이 쫓으면서도 경쾌하고 밝은 화음을 뿜어내는 이 현란한 운궁법이 '올슉업'의 로레인, '그리스'의 샌디를 연기했던 난아의 단어임을 부정할 수 없다.“가수를 하다 뮤지컬 배우로 살고 있는 저를 보며 행여 유행을 좇는 가벼운 사람으로 편견을 갖지나 않을까 싶어 진심으로 가수를 관두려 했었어요. 지금요? 양쪽 다 열심히, 즐겁게 하려고요. 이건 제 직업이니까 행복하게 임하려고요.”
그녀의 유년기는 줄곧 분주했다. 목회를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수원, 부안, 전주, 김천, 경기도 광주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이사를 다녔기 때문.“옮기는 덴 아주 이골이 났었죠. 집이 바로 교회이다 보니 예배당에서 음향기기 켜놓고선 양파 노래 등 가요를 매일 부르고 놀았고요.(웃음)”그런 그녀가 중학교 졸업을 앞둔 무렵, 선생님의 권유로 안양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목사 가정이다 보니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어요. 그래서 돈이 많이 드는 무용이나 클래식 쪽은 배울 기회도 없었어요. 하지만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이런 예술적 열정을 키울만한 곳으론 예술고등학교만한 데가 없더라고요. 기회다 싶어서 두 말 않고 지원했는데, 예고에 진학한 건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자부해요.”
마치 몸 안의 독소를 빼듯, 불필요한 동작들과 생각들을 제거하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연기의 기초를 배우면서, 진실한 음성과 눈빛으로 타인에게 다가가는 소통의 방법들을 훈련하며 열일곱의 난아는 조금씩 프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오니 그건 바로 가수라는 기회였다.“예고라서 학교로 연예인 기획자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저도 그러다 발탁이 됐는데, 소속사에 힙합 뮤지션들이 많다 보니 그들의 랩에 자연스레 노래를 얹게 되었고, 클럽이며 방송 무대에도 따라 오르게 되었죠.”그때부터였다. 감성적인 발라드를 곧잘 부르던 전나혜라는 어린 소녀가 힙합 여전사라는 수식어와 함께‘난아’라는 연예인으로 바뀌게 된 것이.
“방송을 하며 지냈던 지난 6년간은 제게 너무 힘든 순간들이었어요. 짙은 화장에 아슬아슬한 옷을 입고 랩퍼들 옆에서 섹시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제가 참 낯설었어요. 방송을 하면 할수록 가식적인 모습은 늘어만 가고 그럴 때 마다 저를 잃는 것만 같아 두려웠죠. 모든 걸 감당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난아는 패배와 절망이라는 후미진 골목을 찾지는 않았다. 고민도, 아픔도 찰나일 뿐, 그녀는 곧장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힘차게 두 발을 내딛었다.“이전부터 노래와 연기,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올슉업' 오디션에 참여했던 거고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때 만해도 뮤지컬 노래는 아는 게 거의 없어서 팝송을 불렀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앙상블을 했던 언니들이 그래서 제가 좀 별로였대요. 미니스커트에 화려하게 꾸미고 와선 얼토당토않은 노래나 불렀으니 그럴 만도 했죠. 전 몰라서 그랬던 건데. 아, 물론 같이 작품하면서 오해는 싹 풀렸죠. 제 본 모습을 알고서 얼마나 친해졌다고요.(웃음)”
어찌됐건 특정한 배역 없이 몇 년씩 무대 경험을 쌓는 선배들과는 달리 제법 쉽사리 뮤지컬계에 입성한 난아는 그로 인한 부담감도 상당했단다.“'올슉업' 끝나고 생각이 많았어요. 배우라면 다들 겪는 고민 있잖아요? 차기작 결정하는 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뮤지컬은 이제 내 삶에선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는데 소속사에서 방송만 하자고 할까봐 걱정도 됐고요. 그래서 사실 '뷰티풀 게임'의 오디션은 회사에 말도 안하고 몰래 갔어요. 그런데 합격하고 나니 좋은 작품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좋아하더라고요. 저 역시 매우 기뻤죠.”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신작으로, 증오와 슬픔으로 점철된 아일랜드의 젊은이들이 축구라는 언어를 통해 소통하고 이해한다는 뮤지컬 '뷰티풀 게임'에서 차분하고 온건하지만 본인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는 메리를 연기하게 된 난아.“전작들과는 참 다른 역할이라 걱정 반, 기대 반이에요. 외유내강 성향의 메리를 연기하면서 제법 성숙해진 느낌이랄까요. 어젠 연습 하면서 눈물이 너무 많이 나더라고요. 그런 제 자신에게 놀라기도 했어요. 차차 반복을 거듭하면서 감정을 조절하는 법도 훈련하려고요. 저 이러다 내성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건 아니겠죠?(웃음)”
글쎄,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진지한 고민에 선배 배우인 정성화로부터 제목부터 정직한 '산연기'란 책을‘전달’받고서 문장의 행간을 오가며 글자들의 함의를 탐독하기 시작했다는 웃음 섞인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말이다. 그녀의 이력엔 이제 겨우 세 편의 작품만이 올라 있기에 난아를 판단하기엔 조금 이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어쩌다 역할을 맡게 된 행운아도, 순간의 재미를 위해 무대에 오른 풋내기도아니었다. 무대에 오기까지 호된 성장통을 치른 그녀였기에, 난아의 시선은 온전히 무대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스피카토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며 그 곳에서 마음껏 비상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만 남은 듯 했다. 스피카토, 그것의 다른 의미가 바로‘도약’이기에.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