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09.19 17:20
판소리와 뮤지컬의 만남 '공길전(戰)'
문화예술적인 공간 특유의 거품이 조금은 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충무아트홀의 인상이 매우 좋았다. 주변의 공간과는 조금 이질적이기도 하다. 길 건너편에는 며느리에게도 비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신당동 떡볶이 거리가 있고, 뒤편으로는 지금은 쇠락한 동대문 운동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상업지역 특유의 활기와 무관심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그래서 더더욱 충무아트홀의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호젓한 곳에 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문화공간이 아니라 삶의 현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문화공간이기 때문이다. 일 하다가 지나면서 잠시 들러 공연을 볼 수 있는 편안한 공간으로 자리를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뮤지컬 ‘공길전(戰)’이 시작된다. 피아노가 리드를 하고 대금이 베이스를 담당하는 가운데 놀이패들의 코러스가 어우러진다. 피아노와 대금이 이처럼 잘 어울리는 악기들이었던가. 무척이나 신선하다. “가진 것 없기에 더 이상 잃을 것 없지. (…)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지.” 슬픔과 허무를 초극한 지점에서 피어나는 웃음들, 그것은 아마도 미천한 광대들에게 둘러 씌워진 숙명과도 같은 표정일 것이다. 설움과 회한을 한 판의 놀이에 풀어내며, 때로는 인간사의 가장 속 깊은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때로는 부패한 권력을 향해 풍자의 칼날을 겨누기도 한다. 그러한 광대패들 가운데 여장을 한 공길이 서 있다.
‘공길전’은 마당극 또는 판소리가 뮤지컬과 어떠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영화의 경우 외줄에 몸을 맡긴 채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치는 광대들이 화면을 압도했다면, 뮤지컬에서는 마당극의 바탕 위에 다양한 요소를 불러들여 신명과 슬픔의 이야기를 한 판 흐드러지게 펼쳐놓는다. 양악기와 국악기가 앙상블을 펼치고, 비보이 스타일의 안무가 잠깐 선보여지기도 하며, 질투의 화신 장녹수는 재즈 풍의 노래를 들려주고, 광대패들이 신나는 로큰롤 리듬에 맞춰 판을 벌리는가 하면, 오리엔탈 발라드풍의 사랑노래가 관객들의 마음을 적신다. 전통적인 놀이마당 안에 온갖 것들이 다 들어와서 혼종적인 축제를 벌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길‘전’(傳)이 아니라 공길‘전’(戰)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간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공길의 성격이 어여쁜 외모를 반영하듯이 섬약하고 가련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면, 뮤지컬 ‘공길전’에서 공길은 권력을 지향하고 권력에 포섭되어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공길이 감당해야 했던 싸움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풍자의 칼끝으로 탐관오리를 겨눈 전쟁이었을 것이고, 연산군의 사랑을 두고 벌이는 장녹수와의 전쟁이었을 것이며,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우인들과의 싸움이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장생과 연산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공길이 감당해야 했던 전쟁들이 공연이 끝난 후에도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도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 경우라 할 것이다.
뮤지컬의 특수성이 있기에 원작에 수정을 가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장면들은 왠지 작품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돈다는 느낌도 들었다. 특히 모반죄로 체포되어 기둥에 묶인 장생이 자유, 해방, 혁명과 같은 근대적 이념을 설파하는 장면에서는 저절로 갸우뚱해지는 고개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공길전’은 사랑 이야기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왠지 혁명 비극과 사랑 이야기 사이에서 잠시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광대패의 풍자가 특유의 유연성을 잃어버리고 지나치게 직설법으로 제시된 것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하지만 ‘공길전’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펼쳐지는 공길과 장생의 한 판 놀이에서는 울컥하는 그 무엇이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너는 거기에 없네’라며 안타까워하는 공길과 눈이 멀어 앞을 못 보기에 허공을 가를 수밖에 없는 장생의 손짓이 어우러지는 무대는 가히 이 작품의 백미라 할 만하다. 공길의 전쟁과도 같은 사랑을 접하고 나온 길이어서일까. 길 건너편의 떡볶이 골목이 조금은 멀게 느껴진다.